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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6 15:10 수정 : 2006.10.26 15:49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26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통일부 국정감사에 앞서 신언상 차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분석] ‘왕의남자’ 물러나는 또 다른 이유들

이종석 장관은 왜 사의를 표명했을까?

본인과 청와대의 설명은 ‘대북 정책의 정쟁화 회피’와 자신이 정치공세의 표적이 됨으로써 초래될 대통령의 국정운영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충정 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사의 표명은 그가 정권출범 이래 통일외교안보정책에서 노무현의 ‘사람’으로서 해 온 역할과 비중에서 볼 때 다른 각료들과는 달리 다른 관점에서 좀 더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여러측면이 작용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장관 8개월여만의 중도하차는 지난 4년여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감축 한미동맹 조정, 한일 갈등, 한-중 역사문제, 북핵 등 ‘안보의 IMF’ 사태를 나름대로 헤쳐나온 그에게는 대단한 불명예다. 그런 점에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는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이 요구된다.

소외감

가장 먼저 지적되는 부분은 국가안보회의사무처(NSC)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로의 흡수 통합되고 참모에서 통일부 장관으로의 자리 이동 이후에 생긴 ‘소외감’이다. 지난 2월17일 이종석 통일부장관 취임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면서 논란이 있었음에도 이 장관을 NSC 상임위원장으로 공식 임명했다. 당시 송민순 외교차관보의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취임으로 언론들은 새롭게 짜인 외교·안보라인을 이·송의 ‘투톱체제’로 불렀다. 그러나 외교안보정책실은 과거 NSC사무처의 이종석 사람들이 승진기용됐고, 그는 국가안보 관련 주요 현안을 다루는 NSC상임위원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위치에 있었다. 통일외교안보의 총괄 지휘는 이 장관에게 주어진 원톱체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정부의 한 관계자가 말한 것 처럼 “영향력이란 대통령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인데 이 장관은 청와대를 떠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장관이 주재하는 NSC상임위원회는 유명무실화됐다. 4월 들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안보정책조정회의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이 장관보다 반기문 외교, 윤광웅 국방, 김승규 국정원장 등 모두 연배나 업무경력에서 앞서 있는데다 차장 시절에는 윗분으로 ‘모시는’ 관계였기에 상임위원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많았다.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은 이를 대권주자라는 카리스마로 극복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 장관과 정 전장관은 비교가 안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안보정책실무조정회의는 서주석 안보수석이 차관보급을 소집해 주재했다. 이 장관은 통일부 장관으로서 참석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7월초 미사일 발사에서 10월 핵실험까지 핵심현안들에서 통일부 장관의 몫은 제한적이었다. 정부 정책에 깊여 관여하는 한 정치학자는 외교안보정책실의 독주를 얘기하기도 했다. 이 장관으로 보면 참모형 스타일을 극복 못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고립감

사의를 표명한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25일 낮 통일부 직원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국무위원 식당에 들어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참여정부 출범부터 이 장관은 보수세력의 표적이었다. 문제는 내부의 ‘적들’이었다. 청와대의 경우 국정상황실, 민정·시민사회수석실 등 이른바 자주-동맹논쟁의 내부갈등이 계속됐고, 급기야 지난 2월 NSC기밀문서 유출로 터져나왔다. 이들은 정치권으로의 문서유출 등 비정상적 방법으로 미군기지 이전협상과 전략적유연성 협의 등에서 이종석 차장의 ‘대미 굴종의 저자세 외교’를 공격했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 민노당의 노회찬 의원 등이 이런 문건들을 통해 이 장관과 반대편에 섰다. 지난 7월24일 이 장관이 북한 미사일발사를 놓고 굳이 따지자면 미국의 정책도 실패한 것이라고 한 발언을 놓고 한나라당은 장관 교체를 들고 나왔다. 야당이야 늘 그랬던 것이라 해도 최성 의원, 외교부 출신의 정의용 의원등 여당의 통일외교통상위 의원들도 나서면서 그는 한마디로 뭇매를 맞았다. 야당이 불신임안을 내면 상당수가 이탈·동조가 예상될 정도로 이 장관은 여당 내에서 입지가 좁았다. 여야 그리고 시민사회 진보진영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소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이 장관을 지칭하며 다른 각료들에게 소신발언을 주문하는 지원사격을 했으나 도움이 됐으리라고 생각되는 이들은 많지가 않을 것이다.

어긋남


2001년 9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마저 야당에 동조해 햇볕정책에 관한한 김 전대통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임동원 통일부장관에 대한 국회의 해임건의가 가결되자 즉각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임 전장관에 따르면 김 대통령은 임 전 장관이 3번이나 자진 사퇴를 표명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해임건의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바로 임 전 장관을 통일외교안보특보로 기용해 대북정책의 총괄지휘를 맡겨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 장관의 사의표명을 들은 ‘DJ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반신반의하면서 대부분 그가 안보정책실장으로 재기용될 것으로 생각했다.

노 대통령의 대북 철학·신념 부재인가, 임 전특보와 비교되는 이 장관의 카리스마·역량 부재인가. 이번엔 어떤 어긋남이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한겨레>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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