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조인은 "법률해석 문제 등이 복잡할 때면 당시 이회창 대법관 등 선배 법관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를 꺼리지 않았다"며 "하급심에서 봐주기식 판결이 올라오면 여지없이 깨버린 사람이 바로 이용훈 지명자"라고 말했다. 후배 법관들에게 워낙 깐깐하게 재판지도를 하는 바람에 `벙커'(배석판사들이 함께 일하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재판장을 일컫는 법원내 은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렇듯 원칙론을 고수한 탓에 1993년 윤 관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차장에 승진임명됐고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주무위원으로서 `새로운 사법의 태동'의 산파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특허법원ㆍ행정법원을 설치하고 법관인사 기준을 사법고시 서열에서 근무평정으로 바꾼 것 등이 모두 이용훈 지명자가 윤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주도적으로 일궈냈던 성과들이다. 중앙선관위원장 시절엔 칼날처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한편에선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를 빗대 "중앙선관위원장에게는 전관예우도 없다"는 평을 들었고 낙선운동을 벌인 시민단체를 강력 단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같은 `판사 업무' 외에도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시절에는 판사들과 독일어 원서를 강독하고 대법관 때는 비교법실무연구회 회장을 맡아 함께 연구하는 학구적인 면도 있고 한편으론 기독 법조인 모임인 애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 후배 법조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그런지 술도 일절 하지 않으셨고 지금도 연립주택에서 사실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이유들 때문에 최종영 대법원장이 임명되던 1999년에도 그는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로 거론됐고 2000년 대법관을 그만 둔 뒤에도 개혁적 인사가 필요한 법관인사제도개선위원장, 대법관제청 자문위원장,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맡았다. 판사로서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 보호' 원칙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항상 `원칙론적인 판결'을 고수한다는 평가를 얻었고 대법관 시절에는 소수의견을 내는 일이 많았다. 공무원이 받은 돈에 특별한 대가성이 없더라도 직무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될만한 돈이라면 뇌물로 봐야 한다는 판례나 성폭행의 사전모의가 없었더라도 암묵적 협조가 있었다면 특수강간죄에 해당한다는 판례 등을 남겼고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됐다 항소심에서 `선처'된 사건들도 가차없이 파기해 내려보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의 배상 소멸시효가 이미 끝났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에선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소수의견을 냈고 파업기간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세운 대법원 판결 때도 노동자에게 기본생계비마저 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12.12 및 5.18 사건 재판 때는 다른 대법관 12명이 "전두환, 노태우 등의 혐의 중 불법진퇴 지휘관수소이탈죄가 반란죄에 포함되므로 따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 지명자 혼자 "그것만으로도 중한 범죄이므로 별도로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 박준병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무죄를 선고한 다수의견에 맞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을 주장했고 노태우씨 동서인 금진호씨가 1천억원 가까운 비실명예금을 정태수 전 한보회장 등의 명의로 실명전환한 것이 은행 업무방해죄가 아니라는 다수의견과 달리 유죄취지 소수의견을 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최근에는 지난해 말 대법원 최초의 형사재판 공개변론을 거쳐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진정성립' 뿐 아니라 `실질적 진정성립'까지 인정돼야 한다는 획기적인 전원합의체 판례를 이끌어냈다. 반면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대통령측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같은해 10월 정부 공직자윤리위원장이 된 전력 때문에 참여정부가 `코드'가 맞는 법조인을 고른 게 아니겠느냐는 관측도 있다. 김종빈 검찰총장(여수)과 천정배 법무장관(신안)에 이어 대법원장(보성) 자리에 호남출신이 오른 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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