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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9 11:42 수정 : 2005.08.19 11:43

`관리형 비서실장' 및 `보수와 진보의 가교'. 이달말 물러나는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난 1년6개월을 돌이켜보면 이렇게 요약된다.

대학 총장으로 있다 지난해 2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참모' 제의를 수락한 김 실장은 갈등의 안정적 관리와 참여정부의 외연 확대에 있어 소리없는 역할을 해왔다.

우선 김 실장은 대학 총장을 지낸 경험으로 청와대 조직을 `관리형'으로 탈바꿈키시는데 일조했다. `비서실장 = 정권의 실세'의 등식을 `CEO(최고경영자)형 비서실장'으로 바꿨다.

매일 오전 8시10분에 시작되는 일일현안점검회의를 실질화한 것을 비롯해 내부 혁신추진회의 구성, 수석.보좌관들의 업무보고 내용 상시 점검 등을 통해 청와대 참모조직을 이끌었다.

학계에만 몸담다 처음 맡은 `나랏 일'인 만큼 긴장도를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5시50분에 기상, 주요 일간지 숙독을 마친 뒤 출근하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오후 9시 이전에 공관에 돌아와 빠짐없이 9시 뉴스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고 한다.

김 실장 스스로도 "청와대 생활이 정말 힘들다"며 "매일 오전 일일 현안을 점검하고 지시해야 하는데 내가 끌려가지 않고 이끄는 회의를 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상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또한 청와대 내부에 각종 이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도맡았다. 회의를 하다보면 의견차로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인데, 김 실장이 회의를 주재한 뒤로는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은 사라졌다는 후문이다.

김 실장의 또 다른 숨은 역할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김 실장은 취임 당시 `대통령과 코드가 맞겠느냐'는 일각의 우려를 참여정부의 외연을 넓히는 쪽으로 활용했다.

교회 장로인 만큼 개신교 보수교단 지도자들을 만난 것은 물론, 종교계 원로인사, 재계, 언론계, 정계 등의 소위 참여정부 `반대편'에 위치한 단체 및 인사들과 대화 채널을 열어놓는 것도 주된 일이었다.

김 실장은 이들 보수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참여정부는 친북좌경.반미 사상이 농후한 정부 아니냐.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 386에 둘러싸인 정부 아니냐"는 공격 아닌 공격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만약 이 정부가 친북좌경.반미로 똘똘 뭉친 정부라면 내가 한시라도 여기 있겠느냐. 제가 이 자리에 아직도 있지 않느냐"는 말로 설득했다는 게 김 실장의 설명이다.

김 실장은 또 지난 1년6개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인 동시에 직언을 아끼지 않은 최고위급 참모였다. 주요 현안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실장은 "대통령과 얘기하면서 얼굴을 붉힌 적도 두세차례 있었다"며 "나는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하고 대통령은 `어떻게 비서실장이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느냐'며 얼굴을 붉힌 것"이라고 소개했다.

각계 인사들의 공격거리였던 `친북좌경.반미' 문제를 놓고도 노 대통령과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참여정부를 바라보는 사회 한쪽의 시각을 전달, 대통령의 시야를 넓히는 역할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정책 지원자의 역할도 적지않았다. 김 실장은 지난 1년6개월간 일상적인 수석.보좌관회의, 일일현안점검회의 외에도 평택 미군기지 지원사업관련 회의, 대학특성화추진회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지원회의 등을 맡아왔고 비교적 좋은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지난 1년6개월이 공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대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온건노선 유지 및 정무적 경험 부족에 따른 과도 적지는 않았다.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선파동을 시작으로 올초에 집중적으로 불거진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청와대 인사추천회의를 주재하는 김 실장은 사표를 낸 적도 있었다.

또한 지난 4.30 재.보선 이후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당정분리 제고' 등 당.청간 의사소통상 문제가 제기된데 이어 그 여진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도 김 실장에게 일정부분 책임을 지울 수 있다.

철도청 유전개발 사건, 행담도 개발사건 등을 계기로 당.청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김 실장은 청와내 내부의 기강을 다잡으면서 8인회의의 11인회의로의 확대, 고위당정회의의 월1회 정례화, 청와대 정무관계 수석회의 주 2회 운영 등의 조치를 통해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나아가 최근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놓고 대통령의 정무적 참모 기능에 대한 `부실론'이 제기되자 김 실장의 운신 폭이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때문에 차기 비서실장은 `정책.정무 결합형'이 돼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무형 비서실장' 요구가 정치인 발탁을 뜻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 실장도 후임 문제와 관련, "정치적인 면은 대통령이 누구보다 탁월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다"고 말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김 실장이 이달말 퇴임에 앞서 이미 지난 6월 `대통령이 새로운 국정구상을 하고 그 폭을 넓히는' 차원에서 두차례 사의를 표명한 것도 이같은 비판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19일 마지막으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김 실장은 사놓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 50권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퇴임 이후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고 한다. 동시에 오전 5시50분에 일어나는 수고스러움에서도 벗어나겠다고 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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