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도 타파와 정치문화 변화를 위해선 임기 단축도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30일 발언이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겨레>는 31일 각계의 원로와 중견 인사들에게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어보았다. 대부분 대통령의 진정성은 인정하면서도, 적절한 방식의 문제제기였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보이는 편이었다.
지역구도 청산 옳지만 수순 잘못
박형규 목사
대통령의 지향점은 옳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역갈등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정치적 과제다. 많은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현재 여야가 함께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의 지역구도다. 지역구도를 청산하고 정책과 정당이 지향하는 국가적 비전을 두고 국민이 정당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과제는 잘 잡았다. 하지만 그런 정치로 가기 위한 수순은 좀 잘못됐다고 본다. 대통령이 자기 생각을 너무 쉽게 발표했다. 국민들에게 마치 자신의 생각을 선전하 듯 알리지 말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야당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사전에 대통령과 야당, 혹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 실질적인 협상이나 대화가 있어야 가능한 문제다.
야당이 사사건건 대통령의 결정이나 실수를 따지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를 국민들에게 먼저 발표하는 것이 지역구도 청산과 새로운 정치문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말을 앞세우기 보다는 야당과 물밑 접촉을 가졌었으면 한다. 상대방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이 아쉽다.
현정부에 기대하는 건 과거청산
정영태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사명은 과거 청산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의미다. 과거 권위주의와 부패구조에 연관됐으면서도 아직까지 권좌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정리하고 청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에 기대하는 내용도 그런 맥락이다.
구세력과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노 대통령 나름의 안정적인 정치적·사회적 지지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정부는 신자유주의 쪽으로 경제체제를 개편하려 하는데, 이 방향의 개혁에 기초를 이루는 것이 구정치 집단이나 보수언론 등의 보수동맹이다. 반면 민주노총 등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업자니,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란 방향과 걸맞지 않는다.
지금 노 대통령은 튼튼한 정치·사회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 기득권 세력을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국민들에게 실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노 대통령의 ‘연정’ 발언 등은 당장의 과거 청산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해 우회하겠다는 의미다. 결국 현정부가 과거 청산과 신자유주의 개혁 가운데 어떤 문제를 우선 순위에 두느냐의 문제와 잇닿아 있다.
지역통합 충정 존중…지혜 모아야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
도법 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 탁발 순례 중)
한 달 쉬고 어제부터 다시 경북 고령에서 탁발 순례를 시작해 걷느라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뉴스도 듣지 못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고라도 지역 통합을 해보겠다고 한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은 충정대로 받아들여 존중했으면 한다. 그런 제안을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왜 한국 사회가 끌어안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이미 형성된 틀과 선입견에 의한 상호 불신 때문에 그런 충정을 끌어안지 못하고 함부로 취급하는 것 같다. 좌우나 기존의 틀이 너무 완고하고, 사회가 움직이지 않으니 대통령이라도 이쪽 저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발언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답답하기 보다는, 이런 기회를 희망으로 끌어안지 못하고 편가르기만 하는 한국 사회가 답답하다. 머리로 이해타산만 하기 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
밑바닥 민심 동의하는지 살펴야
조비오 신부(광주 풍암동성당)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과 충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외적인 정치형태의 변화로 지역구도를 깨뜨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외형적 변화가 민심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가져오지는 않는다. 지역민들의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
노 대통령의 뜻과 구도가 현실화한다고 해도 지역 민심의 구조적 완고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태껏 지역 민심은 진실이나 사실보다는 소수 인사나 집단이 오도하고 부추기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지역에 따라 성격이 다르고 편차도 많이 난다.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이중적인 모습조차 보였다. 이런 지역구도를 깨려면 먼저 지역의 민심을 보편적 민주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노력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정치·학술·문화·사회 모두 손잡고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면 민심은 차츰차츰 순화되고 보편주의적 정의감과 애국심이 마음 속에 자리잡을 것이다. 장기적인 정신운동에 성패가 달려 있다.
대통령 혼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동의하라 하지말고 먼저 밑바닥 민심에 귀부터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민심이 동의하는지 아래로부터 검증받지 않으면 실현성이 줄어든다.
진정성 믿지만 현실성은 떨어져
박원순 변호사
대통령이 그런 제안을 하는 취지, 곧 지역주의를 해소하자는 뜻에는 동의한다. 지역주의 해소라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이고, 그것을 위해 대통령이 노력하는 것은 좋다. 또 대통령의 진정성도 느껴진다. 달걀로 바위를 치듯이 아무리 여러 번 낙선해도 영남에서 계속 출마하던 과거사를 알기에 그 진정성을 믿는다.
하지만 그런 제안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 방안이냐는 또다른 문제다. 연정론은 이미 상대방이 안 받겠다고 하지 않는가.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없거나 반대하는 반응이 나왔는데, 이를 계속 언급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지역구도 해소가 연정으로만 가능한 것도 아닌데, 계속 이를 언급해야만 하나?
대통령은 중대선거구제를 제안하는 모양인데,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야당에서 반대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비례대표제를 강화하거나 지역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여러가지 방식을 두고서 연정에 너무 목을 매고 있는 것 같다. 연정론과 중대선거구제 이외에 좀더 현실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방식들을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
왜 ‘지금’ ‘이 방식’ 인지 이해안돼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삼성 엑스파일 사태로 드러난 정·경·언 유착,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 양극화 등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왜 하필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과연 선거법 개정 등의 문제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시기에 해야 되는지 심각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대통령이 저렇게 나간다면 어떤 방식이건 선거법 개정 문제가 당분간 한국 사회의 중심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 문제가 중심 화두가 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지난 탄핵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미래설계할 때에 사회역량 소모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대통령의 지위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위는 임기 5년 동안 국민으로부터 역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를 개인의 선호, 판단, 기호에 의해 판단하려는 것은 과거의 전제정치 시절과 발상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올해와 내년은 광복 이후 지난 60년 이래 처음으로, 한국사회가 정쟁적인 정치 문제로부터 벗어나 장기적인 개혁과 전망을 내올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가진 시기다. 좀더 원론적으로 장기 미래 전망을 설계해야 할 판에 온 국민이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없는 좁은 의미의 쟁점으로 사회 역량을 휘몰아 넣어 소모시키고 있다.
대통령은 그동안 주변의 예상을 뛰어넘는 승부수를 던져 승리해 왔다. 그 승부수에 힘을 실어준 것은 국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이 투정 부리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사력을 다해 구해줘야 할 하등의 역사적 필연성을 못 느끼고 있다. 되면 하고 안 되면 물러나겠다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느긋하고 한가하지 않다. 잘못하면 그동안 쌓아온 한국사회의 민주역량이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선거구 개편, 헌정중단 사유 안돼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선거구제 개편 문제가 국민이 뽑아주고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의 임기를 중단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국민들이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 대통령이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먹고 살기 힘든데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 다시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한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특히 헌정사가 불행하게 중단됐던 뼈저린 경험과 그것이 가져오는 혼란을 역사적으로 체험해 온 마당에, 과연 선거구제 개편이 헌정을 중단해야 하는 과제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 지역구도 때문에 우리 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참여정부가 국정운영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가 지역구도나 선거구제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대통령의 저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은 선지자가 아니다. 대통령의 지금 태도는 마치 선지자가 뭇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역사의 가르침을 주면서 끌고 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선지자로 놓고 국민을 가르치려는 것 같다. 이는 민주국가 지도자로서의 덕목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납득할 수 없다.
검증과정 빠진 즉흥적 발언인듯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대통령의 임기 단축 발언은 국정 책임자로서 정밀하고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하는 발언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이고 즉흥적인 발언 같이 느껴져 책임있는 자세로 보이지 않는다. 통치자는 한 나라의 통치 문제와 관련해 세부적인 안을 만들고 다양한 토론과 검증을 거쳐 방법을 내놓아야 한다.
또 대통령이 문제 삼았던 지역갈등 해소는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임기 단축, 연정 등의 조처로 지역갈등 문제가 해소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현 정치 상황이 결정적으로 파국적인 상황도 아니고, 민생문제 등을 제쳐두고 지역갈등 해소에 집착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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