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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4 07:41 수정 : 2006.05.24 08:48

23일 오전 로스앤젤레스 공항 인근의 에어포트힐튼호텔에서 열린 탈북 망명자 기자회견에서 탈북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나, 나오미, 요한, 신찬미, 데보라, 신요셉씨.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미국 망명 탈북자 6명 LA서 기자회견
인간 이하의 지옥같은 탈북과정 1시간50분간 증언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이들이 우리처럼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지난 5일 난민자격으로 미국에 망명한 탈북자 6명은 23일(이하 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에어포트 힐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에서 탈북한 계기와 중국에서 겪었던 참상, 북한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했다.

짙은 선그라스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나온 이들은 약 1시간50분동안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으로 건너와 인신매매와 성폭행, 구타 등 그동안 겪은 인간 이하의 삶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남자 2명, 여자 4명인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찬미(20.여.가명)씨는 맨 먼저 증언에 나서 5차례나 인신매매 당하고 북한으로 여러차례 끌려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충격적인 사연을 전했다.

4년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한 찬미씨는 2003년 베이징에서 붙잡혀 북송됐다가 미성년자로 풀려나 재탈북했고 2만위안에 팔려가 강제로 결혼했지만 빠져나와 한국으로 향하려다 2004년 2월 베이징 대사관에서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보내졌으나 자유를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찬미씨는 특히 수용소에서 형기를 마치기 전에 사망하는 죄수들에 대해 이중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관절을 꺾어 묻는 형벌을 목격했으며, 길가의 옥수수를 따먹었다며 빗속에서 옥수수로 재갈을 물리는 등 극심하게 고문받았던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또 2번째로 증언한 한나(여.가명)씨는 예술체조 지도교원으로 근무하던중 군복무중이던 남편의 사고로 갑작스레 가계 형편이 어려워졌고 당시 12살 짜리 딸아이의 스포츠웨어를 사겠다는 일념아래 국경을 넘는 물건 배달을 하던중 중국에서 인신매매단에 끌려갔다고 밝혔다.

지난 5일 미국에 망명한 한 탈북 여성이 23일(이하 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에어포트 힐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에서 탈북 과정을 증언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나씨 역시 2만위안에 팔려 선양으로 가 50대 중국인 집에서 지옥같은 삶을 살았으며 쉴사이없이 구타당했지만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채 치료받지 못했고 이곳에서 딸을 낳았지만 공안에 붙잡히면서 또다시 헤어지고 말았다면서 "이런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증언이 민족을 구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고 밝혔다.


1998년 탈북해 한차례 북송됐다가 재탈출한 나오미(여.가명)씨는 "중국인에게 팔려가 3년간 갖은 멸시를 받았고 출산 6개월만에 북한에 다시 끌려가야만 했다"면서 북한 수용소에 있을때 출산이 임박한 한 여성이 강제로 낙태 수술을 받은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병들어가던 참상을 증언했다.

나오미씨는 "워싱턴에 갔을 때 우리를 보고 `왜 왔느냐, 북한에서 죄짓고 온 것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북한의 실상, 중국에서 겪는 탈북자의 실상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요한(가명)씨는 왜 미국을 택했느냐는 질문에 "미국에 가면 가족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고 한국으로 건너간 탈북자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채 나쁜 이미지를 남겨 취직하기도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며 "우리는 여전히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지만 단지 정치 체계가 잘못되고 경제난 때문에 살기 어려워 탈북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탈북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를 원하며 그러면 피맺힌 원한이 풀릴 것"이라며 "남북이 통일되기를 희망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 탈북자의 미국 망명을 이끌어낸 두리하나선교회의 천기원 목사는 현재 선양의 미 총영사관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미국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한국대사관에 대기해 있다가 미국 총영사관으로 넘어온 까닭에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면 현재 한국내에 있는 탈북자들도 똑같이 처리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라며 "구체적인 결론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천 목사는 이어 "이들 탈북자가 어느 곳에 정착할 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LA에 정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한인교회연합(KCC) 측이 탈북자 지원을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중이어서 조만간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회견장에는 한인교회연합(KCC) 관계자들과 신문,방송 취재진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장익상 특파원 isjang@yna.co.kr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망명 탈북자 기자회견 전문

지난 5일 한국을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한 탈북자 6명은 23일(이하 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 겪었던 참상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다음은 탈북자들이 전하는 북한 탈출 계기 및 중국내에서의 인신매매와 성폭행, 북한 수용소의 참상이며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찬미(여)=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도와준 많은 이들의 기도 덕에 자유를 찾았다. 16살때인 2002년에 밥 실컷 먹고 싶어 국경 넘어 친척 집 찾아가다가 3번이나 팔려다녔다. 2003년 북송됐지만 미성년이어서 풀려났으며 다시 북한에서 살 수 없었다. 거의 먹을 게 없어 재차 탈북했다. 또 팔려갔다가 현재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셋째오빠를 만났고 2004년 오빠와 함께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던중 오빠는 잡혀갔고 나 역시 며칠 후 다시 북송됐다. 감옥에서 만난 오빠는 정치범 수용소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3년형을 살게 됐다. 1년7개월 감옥에 있었는데 다른 7명은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이때 고통은 말하기 힘들 정도다. 먹을 게 없어서 모두 얼굴이 붓고 배가 퉁퉁 부어 하루에도 3~4명씩 죽어나갔다. 죽은 시체를 묻으러 2번 갔는데, 시체를 자그마한 창고에 마구 던져놓았다. 여름에는 시체에서 냄새가 풍겼고 산 꼭대기로 개처럼 끌고가 구덩이에 묻을때 시체의 관절을 꺾었다. 형기를 채우지 못한 이중범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랬는데, 관도 없이 맨 땅에 묻었다. 배가 고파 옥수수를 따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죄로 많은 교정(고문)을 받았다. 입을 벌려 옥수수를 물리고는 무릎 꿇고 손을 위로 올려 빗속에서 반나절동안 있게 했고 견디다 못해 쓰러졌더니 구둣발로 온 몸을 찼다. 그래서 오른손 세번째 손가락이 기형이 됐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영혼들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올해 2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50대 남자에게 팔려갔는데 마침 인근에서 오빠가 살고 있다는 걸 알았고 구해줘 도망쳐 나왔다.오빠가 2년전부터 천기원를 목사 알고 있어 미국으로 오게됐다. 이제 자유를 찾았다. 감옥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려줬으면 좋겠다. 탈북해 헐값에 팔려가는 여성들을 구해달라. 그리고 중국 당국은 방황하는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보내지 말아달라. 나는 고생했지만 자유를 찾았다. 언론이 모든걸 공개해서 북한의 사람들을 구해달라.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다.

◇한나(여)= 평양에서 예술체조 지도교원(무용하고 다름)으로 있다가 군복무중인 남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가정 살림이 아주 어려워졌다. 담당 학부형에게 사정을 말하고 나서 그 사람과 국경 지역 장사를 떠나게 됐다. 남편이 말렸지만 딸(당시 12살)이 다른 아이들 입는 운동복을 부러워했다. 학부형이 짐을 들고 다녀오면 2천원을 주겠다고 했다. 딸 운동복을 사주고 가정 살림에 보탬이 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때 딸이 "꼭 가야 되냐고, 운동복 사줄 수 있느냐고...약속해달라고 해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직도 가방을 메고 등교하던 딸 아이의 모습이...(울음) 사흘간 여행한끝에 국경에 도착했다. 중국과 거래하는 3자거래집에 들어가 하루를 묵게 됐는데 주인이 주는 빵을 먹었다. (수면제가 들었는지) 정신을 차리니 머리가 띵하고, 지하 감방에 손 발이 묶인채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묶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었다. 중국돈 2만위안에 선양으로 팔려가 중국인과 살게 됐는데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지금도 머리에 뼈가 나온 상처가 있는데 가슴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조선족 여성을 폭행하는 일이 다반사다. 조선족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잘못하면 공안에 고발한다고 해 반항할 수도 없다. 어느날은 칼을 들어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도 했지만 딸 생각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딸 하나를 낳았다. 탈북자들이 이처럼 고통받는 것은 중국 당국이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민족을 구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 (한나씨는 이후 취재진 질문에서 현재 딸들을 데려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했다)

◇나오미(여)= 1998년 탈북해 중국에 건너갔다. 94년부터 시작한 북한 식량 난에다가 어머니가 장사하던중 병세가 악화됐다. 아버지쪽 친척이 중국에 있어 도움을 받으려 중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중국 조선족에게 부탁, 친척집에 데려다 주면 돈 주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떠나 지린성 용성시 도착했지만 헤이룽장성에 팔려갔다. 3년간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았다. 중국인들은 조선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면 돈으로 사왔다면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병 치료도 안해준다. 1년간 걷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꾀병이라면서 병원에도 안데려갔다. 참다 못해 친척집으로 도주, 친척이 소개한 사람과 결혼해 임신 6개월째 되던 때에 공안에 체포됐다. 공안들이 악랄하게 심문했다. 동네에 사는 북한 사람들을 대지 않으면 아이를 걷어차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에 잡혀가면 모두 죽는데 모두 살리려면 다 대라고 협박했다. 공안에게 5천 위안을 주고 풀려나와 1년간 5천위안 갚기로 하고 업소와 계약했다. 출산후 6개월만에 다시 공안이 잡으러 왔다. 내복 바람에 맨 발로, 아이도 못보게 하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에서는 청바지 입고 있었는데 청바지가 미국의 상징이라면서 미국이 인디언 죽일때 입은 것이라며 벗겼다. 당시 11월이었는데 아이를 당장 해산할 여성이 있었다. 그 여자는 배가 불룩했는데 어느날 병원으로 끌고가 침대에 팔을 묶어놓고 다리를 묵고는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켰다. 그날로 여자를 다시 감방에 넣었다. 낙태했으니 얼굴은 부어오르고, 그래서 보다못해 콘크리트 바닥에 뉘일 수 없으니 간수보고 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런 말 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다. 철장에 무릎 꿇려 손을 밖으로 내밀게 하고는 나무 몽둥이 등으로 손을 때리고 머리를 때렸다. 그 여자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고문과 박해를 못견디고 숨지는 사람 이 많다. 이 자리를 빌려 북한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극심한지 말하고 싶다.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워싱턴에 갔을 때 우리 보고 왜 왔느냐, 북한에서 죄짓고 온 것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이런 이야기 들을때마다 북한 실상, 중국에서 겪는 실상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 여성들은 거의 100% 인신매매 당해 팔려다닌다. 중국에서 일해도 탈북자인 것을 알면 월급도 안준다. 일자리를 얻어 여러곳에서 일했었는데, 탈북자 신분 들어나면 몇천위안씩 되었지만 안줬다. 우리는 결국 하느님 선택받아 자유를 얻었지만 북한에 있는 동포들, 중국내 탈북자들이 아직도 인신매매당하고 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였으면 한다. 세계가 북한에 인권 압력을 가했으면 좋겠다. 중국이 탈북자를 북송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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