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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공동선언 발표 여섯 돌을 기념하는 민족통일 대축전 참가차 고려항공 전세기편으로 광주에 도착한 북쪽 대표단이 14일 오후, 비가 내리는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추모탑에 꽃을 바친 뒤 묵념하고 있다. 6·15 민족통일 대축전은 17일까지 열린다. 광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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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서 통일로, 6·15공동선언 실천하자”
박경순 관리소장 “세상 참 좋아졌지요?” 2006년 6월14일 광주에선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시작됐다. 빛고을 광주엔 종일토록 굵은 비가 쏟아졌다.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누워 있는 광주의 영령들도 소리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이 비는 고통에 찬 통곡의 눈물은 아니다.
김영대 북쪽 당국 대표단장 등 북쪽 관계자 60여명과 남쪽 행사 관계자 등 100여명은 14일 오후 4시 망월동 묘지를 찾았다. 공식 참배를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행사 취재 기자의 일원으로 미리 그곳에 가 있었다. 민주묘지 안 ‘민주의 문’ 앞에서 서성이다 마침 북쪽 관계자들의 참배를 안내하려고 옆에 있던 박경순 ‘국립 5·18민주묘지 관리사업소장’을 발견했다. 그에게 물었다. ‘소회가 어떠냐?’고. 박 소장이 씩 웃으며 반문했다. “세상 참 좋아졌지요?” 다시 물었다. ‘공식적으로 소회를 한마디 해달라’고. 박 소장은 “여러 말들이 있어 조심스럽다”며 입을 닫았다. 그리곤 ‘비공식 소회’를 덧붙였다. “80년 5월에 그랬잖아요. 북에서 사주했다고. 진실은 그게 아니잖아요. 오늘은 저나 광주사람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역사적으로 아주 뜻깊은 날입니다.” 광주가 어떤 곳인가? 1980년 5월17일 전두환 등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12·12에 이어 제2차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온몸으로 저항한 민주의 성지다. 한반도 전역이 신군부의 폭력 앞에 주눅들어 침묵 속으로 잦아들 때, 빛고을 광주엔 나라지키라고 세금바친 한국군의 손에 의해 피를 뿌리며 쓰러져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화려한 휴가’라는 후안무치한 작전명 아래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자, 민주수호의 제단에 바쳐진 처절한 저항이었다. 그렇게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현대 한국 민주주의를 풍부하게 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의 발원지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비극적 명제가 아니더라도, ‘광주’는 2천여 시민의 피로 난파 직전의 한국 민주주의에 길고 질긴 생명력을 불어넣어왔다. 파란만장했던 1980년대, ‘광주’는 87년 6월 항쟁의 밑돌이 되었고, 지금도 한국 민주주의의 키핀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경순 소장이 새삼스레 상기시킨 것처럼, 1980년 5월 신군부는 빛고을 광주의 저항을 ‘북한 공작원들이 배후조종·사주하는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26년이 흐른 지금, 그때 광주의 저항이 ‘빨갱이들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일부 시대착오적인 인사들을 빼고는. 누구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이고, 누구에게는 일상에 주저앉으려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영감일 바로 그 빛고을 광주에 ‘5월의 전사들’을 사주했다던 북한의 당국 대표단이 참배를 하러 왔다. 그것도 남북 당국의 공식 합의 아래. 북쪽 대표단의 태도는 숙연했다. 김영대 당국 대표단장과 안경호 민간 대표단장 등 북쪽 관계자들은 ‘민주광장’의 한반도 지도 모양의 꽃밭을 지나 ‘5·18민중항쟁추모탑’ 앞에 이르러 모두 우산을 접었다. 굵은 비는 아랑곳 않고 쏟아졌다. 북쪽 관계자들은 북쪽에서 미리 준비해온 꽃다발 수십개를 추모탑 제단에 올렸다. 한 관계자가 나지막하지만, 강하게 외쳤다. “5·18민주열사를 추모하며 모두 묵상”. 다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박 소장의 안내를 받아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묻혀 있는 1묘역으로 이동했다. 박 소장이 묘지번호 ‘1-01’ 앞에 멈춰섰다. ‘김경철의 묘, 80년 5월19일 사망, 52년 8월11일 생’. ‘5월 광주’의 최초 희생자인 김경철씨의 묘다. 그렇게 박기현(80년 5월22일 사망, 65년 2월8일 생, 묘지번호 1-06), 차미애(80년 5월21일 사망, 57년 2월6일 생, 묘지번호 1-60) 등 3기의 묘를 둘러봤다. 우리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사연을 지닌 묘지들이다. 북쪽 사람들은 참배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묘지를 둘러보는 와중에 김영대·안경호 단장과 박경순 소장의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안=“여사님은 열사와 혈육이신가요?” 박=“오빠가 돌아가셨죠.” 안=“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박=“고맙습니다.” 김=“이 가운데 학생은 얼마나 되나요?” 박=“40% 남짓 됩니다.” 김=“생각할수록 가슴 아프네요.” (박 소장의 오빠인 박병규-당시 20살, 동국대생-씨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숨졌다) 난 북쪽 사람들이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짧은 시간의 문답으로 그걸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참배 태도와 마음가짐이 지난해 8월14일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대축전’ 때 이뤄진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 때보다는 진지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김영대 단장은 남쪽 당국 대표단장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환담 때 “북쪽에서도 광주를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다”며 “갑오농민전쟁과 광주학생운동, 1980년 5·18 등 북녁 동포들의 광주에 대한 인상이 깊다”고 말했다. 김영대·안경호 단장은 북쪽 사람들을 대표해, 25분 남짓한 참배를 마치고 묘역을 떠나기 전 준비된 방명록에 이렇게 서명했다. “5·18용사들의 정신은 6·15시대와 더불어 길이 전해질 것이다. 북측 당국대표단 단장 김영대. 2006년 6월14일.” “5월의 렬사들에 경의를 표합니다. 6·15공동선언 실천 민족공동위원회 북측위원회 위원장 안경호. 2006년 6월14일.” 머릿속을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이지만, 이날 북쪽 대표단의 망월동 묘지 참배를 나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치적 해석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몸으로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일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있겠지’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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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실천민족통일대회가 15일 광주 문예회관에서 열린 가운데 행사장을 찾은 어린이들이 민족통일대축전을 알리는 대형 남북단일기가 걸린 애드벌룬 줄을 잡아당기며 놀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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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6·15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 남쪽 민간 대표단장인 백낙청 선생은 ‘광주 6·15대축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광주는 아픈 과거를 희망의 미래로 바꿔놓은 민주화의 성지이자 통일의 열기가 어느 곳보다 뜨거운 고장이다. 이번 6·15대축전은 ‘민주의 성지’에서 ‘통일의 희망’을 발견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6·15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이며, 민족의 운명이 함께 가 닿아야 할 내일의 지점이다. 6·15행사가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화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충만한 민족의 대축전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4일 저녁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15대축전 개막식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그는 1980년 신군부세력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폭동을 일으킨 내란음모사건의 수괴’라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의 이 ‘민족통일대축전’의 광경을 보고 망월동 국립묘지에 계신 영령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면서 오늘의 모임을 축하하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5·18 광주정신은 민주, 평화, 통일의 정신이었습니다. 6·15 남북정상회담의 정신도 이러한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바가 큽니다.” 지금 광주 시내엔 6·15대축전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수없이 많이 걸려 있다. 그 하나엔 이렇게 적혀 있다. “오월에서 통일로, 6·15공동선언 실천하자.” 광주는 그렇게 ‘박제된 역사’를 거부하고 늘 살아숨쉬려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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