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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분단의 그늘 2일 낮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에서 열린 ‘통일애국열사 정순택 선생 민족통일장’이 끝난 뒤 유해가 북으로 옮겨지기 위해 적십자사 구급차에 실려 병원을 빠져나가자 비전향 장기수들과 민가협 회원 등이 손을 흔들며 이별하고 있다.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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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송환 기다리는 28명중 절반이 팔순 넘겨 70대는 어린축…정순택씨 주검 복송길 착잡
“죽기 전에 딸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야. 이제 희망이 보이는 것도 같지만, 시간이 없어.”
암 투병 중 지난달 30일 숨진 장기수 정순택씨의 장례식이 열린 2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병원을 찾은 박종린(73)씨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숨져서야 북쪽의 주검 인도 요구로 북의 아들들에게 가는 정씨를 보며, 자신을 비롯한 2차 송환 대상자 28명의 운명도 정씨와 같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의 얼굴에 묻어났다.
1959년 2월 공작원으로 남파된 박씨는 반년 만에 붙잡혀 3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남쪽에 일가친척이 없는 그는 한동안 이 교회 저 교회에 몸을 의탁하고 지냈다. 지금은 2차 송환 대상자로 꼽혀, 딸이 있다는 평양에 갈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어린 축에 속하고 건강도 그럭저럭 좋은 편이지. 다른 사람들은 정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정씨의 주검이 대한적십자사 구급차에 실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담(73)씨는 “나도 죽을 때가 됐는데…”라고 말했다. 65년 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된 강씨는 복역 중인 71년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전향서를 썼다. 이 때문에 강씨는 아직 함경남도 홍원군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나 전립선암 걸렸거든. 고향에 아이 셋이 있어. 둘은 아들이고 막내는 딸인지 아들인지 몰라. 죽기 전에 아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주고 싶은데….” 뇌졸중 후유증까지 있어 걷는 것과 말하는 것이 힘든 강씨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장기수 노인 50여명의 마음은 엇비슷했다. 고향이 남쪽이라, 또는 이제 북에 가서 무엇하겠냐는 이유로 북송을 택하지 않은 장기수들도 있었지만, 북송을 원하는 이들의 애타는 마음은 누구보다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권오헌 비전향장기수북송추진위 상임공동대표가 추도사에서 “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 통일부를 통해 긍정적 답변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라고 말하자, 이들은 모두 어깨를 들먹이며 훌쩍였다. 또 낮 12시께 주검이 북송된다는 소식에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들은 운구차가 병원을 떠날 때 “잘 가시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자리를 떴다.
비전향장기수북송추진위는 2000년 1차 장기수 송환 때 미처 신청을 안 했거나 전향서를 냈다는 이유로 제외된 28명이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80살을 넘겼다.
한편, 정순택씨의 주검은 이날 오후 판문점을 통해서 북쪽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북쪽의 장남 정태두(김책공업종합대 교수)씨가 오후 6시37분께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군사정전위원회 사이 군사분계선에서 선친인 정씨의 유해와 유품을 넘겨받았으며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어머니도 바랐고 우리 자식들도 바랐으나 이렇게 주검으로 오시다니 정말 유감스럽다”고 말했다고 우리쪽 한 참석자가 전했다.
정씨의 부인은 90년대 중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남쪽 거주 사망자의 주검을 북쪽 유족에게 인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씨의 주검을 실은 구급차 등 운구행렬은 이날 오후 1시45분께 보라매병원 영안실을 출발해, 북쪽의 인수 인력과 만나기로 한 판문점으로 향했다.
이날 송환은 정부가 정씨의 사망 직후인 30일 밤 10시30분 북쪽에 사망 사실을 통보한 뒤, 북쪽이 이날 오전 발인을 앞두고 오전 9시30분께 주검 송환을 요청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앞서 30일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대북 전통문을 통해 임종을 앞두고 있던 정씨의 북쪽 가족에게 남쪽 지역 방문을 요청했으나, 정씨는 당일 오후 6시50분께 84살을 일기로 숨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 간에 상대쪽 지역의 유가족에게 유해를 전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남북의 화해와 인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발생하면 송환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정부 당국자는 “정씨의 경우 북으로 보내는 문제를 검토하던 중이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북쪽 가족의 임종마저 이뤄지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며 “이번 임종 요청과 시신 송환 결정은 전적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의 조처”라고 말했다.
정씨는 지난달 4일 입원해 췌장암 및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고인은 북쪽에 태두씨를 포함해 아들 4형제를 두고 있으며 모두 고위직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조기원 강태호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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