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19 21:30
수정 : 2016.08.19 21:30
정부, 태영호 주영 북한 공사 ‘귀순’이라 표현
박근혜 정부 대북 태도, 남북대결시대로 역진 징후
1997년 이후 법률 용어는 ‘북한이탈주민’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가족의 한국행을 두고 ‘귀순’ ‘망명’ ‘탈북’ 등 서로 성격이 다른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외국 언론은 예외 없이 ‘망명’이라고 부르는데, 한국 정부와 언론에선 ‘귀순’과 ‘탈북’이 혼용된다. 어떤 용어가 적당할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망명’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있거나 박해를 받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하려고 외국으로 몸을 옮김”이라는 뜻이다. “정치적인 이유”와 “외국으로”가 중요하다. 외교관 신분인 태 공사가 국제법상 별개의 주권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서 대한민국(한국)으로 피신했으니 ‘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외신이 ‘망명’이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언론은 망명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 따라 북한은 외국이 아니며, 헌법 3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에 따라 북한 주민을 원칙적으로 한국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17일 태 공사 가족의 한국 입국 사실을 발표하는 긴급 기자회견의 문답 과정에서 “태 공사의 탈북 동기”라거나 “태 공사의 귀순”이라며 두 용어를 섞어 썼다. 하지만 두 용어는 정치적 함의와 공식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귀순’은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이라는 뜻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귀순이란 말은 남북대결시대의 유산”이라고 말했다. 실제 ‘귀순’은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1962년)→‘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1979년)→ ‘귀순북한동포 보호법’(1993년) 등에서 법률 용어로 쓰였다. 그러다 1990년대 탈북자 급증 탓에 이전의 ‘특혜적 지원’에서 ‘체계적·법률적 지원’으로 정책 전환의 필요가 커짐에 따라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귀순’은 법률 용어의 지위를 잃었다. 이 법 2조1항을 보면, ‘북한이탈주민’은 “군사분계선 이북지역(북한)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사람”이다. 가치판단이 배제돼 있다. 탈북자는 북한이탈주민의 약칭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귀순’의 재등장은, 남북관계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집단심리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 대결 시대로 역진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편, ‘태 공사 일행이 긴박하게 영국을 떠나느라 제3국에 있던 딸이 한국에 오지 못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태 공사한테 딸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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