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11 20:16
수정 : 2017.01.11 21:51
가신이의 발자취 ‘한반도 전문가’ 해리슨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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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그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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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그 해리슨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가 참 무심하게 살아왔구나 하는 회한이 가슴을 적신다.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11년 동안 그는 내가 가장 자주 만나고, 가장 가깝게 지낸 미국인이었는데, 2008년 이후 거의 잊고 지냈던 터다. 이명박 정권의 권력기관들이 나를 <한국방송>(KBS) 사장 자리에서 축출하기 위해 총동원되어 괴롭혔고, 정치 검찰은 심지어 배임죄로 엮어서 사법 고문을 한 혹독한 세월이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무심하게 소식을 끊고 지낼 사이는 아니었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잿빛 겨울 들판처럼 허허롭다.
내가 셀리그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북한 핵문제가 본격적으로 쟁점이 되기 시작했던 시점인데,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그의 한반도 관련 기고문을 읽게 되었다. 내용이 참 좋았다. 바로 연락을 하여 만나게 되었다. 그 뒤 자주 만나면서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내게 또한 아주 소중한 취재원이기도 했다. 오랜 언론인 생활, 카네기, 브루킹스 등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 아시아 전문가로 일하면서 쌓은 지식과 경륜, 무엇보다 한국 기자들에게는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미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의 각종 모임을 통해 얻는 정보들이 그에게는 풍성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한겨레>에 칼럼을 쓰게 되면서 같은 식구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는 참 좋아했다. <한겨레>를 통해 한국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정말 기쁘다고 했다. 그렇게 많지 않은 원고료인데도, 그걸 전해 주면 점심을 사겠다고 우겼다.
그는 <한겨레> 칼럼 뿐 아니라 미국 주요 신문의 기고문, 미국 방송 출연을 통해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 강경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그는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 실천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미국이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대화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그는 특히 미국 국방부와 정보기관 내의 강경파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고, 이들 중 일부의 이름을 밝히며 ‘악의 축’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워싱턴을 떠나 귀국한 뒤에도 그와는 연락이 이어졌다. 내가 <한겨레> 논설주간으로 일할 때, 그는 두 번 서울을 방문했는데, 우리는 마치 오랜 고향친구처럼 그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반겼다. 그리고 2005년 봄, 내가 케이비에스 사장을 할 때 그가 다시 서울에 왔다. 내가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하니, 그는 굳이 내가 일하는 곳을 보고 싶다며 사장실로 찾아 왔다. 마침 그는 11번째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서울을 들린 때였다. 그는 당시 78살이었는데도, 그렇게 직접 현장을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고, 쉼없이 연구하고, 글을 쓰고, 저서를 남겼다. 전문 지식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는 구체적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78살의 연구원이 그렇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미국 싱크탱크의 토양도 부러웠다.
그는 미국 강경파들과 싸우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힘써 온 ‘선한 미국인’이었다. 그의 부음을 듣자, 참 좋은 평화의 동지 한 분을 잃은 허전함이 크다. 해리슨 선생. 평화의 안식을 누리며 편히 쉬소서.
정연주 <한겨레> 초대 워싱턴특파원, 전 <한국방송>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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