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열린 ’아일랜드와 한반도’ 국제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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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분쟁지였던 벨파스트 시내의 아침 등교길은 여느 도시와 다를바가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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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13시간 반의 비행 끝에 런던을 거쳐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벨파스트는 농촌마을들에 둘러싸여 온통 초록이었다. 그 가운데는 축구장도 한 몫을 했다. 축구에 대한 열기는 벨파스트 ’조지 베스트’ 공항에서도 느낄 수 있다. 조지 베스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유명한 축구선수였다. 저녁 무렵의 벨파스트 시내는 전날 비가 온 뒤 갠 탓에 높고 푸른 청량한 가을날씨를 보였다. 1년에 하루 이틀 있을가 말가한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숙소로 가는 길에 다소 흉물스럽게 보이는 조선소의 거대한 타워크레인 골조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1912년 침몰한 당시 세계 최대규모의 호화유람선 타이타닉이 벨파스트에서 건조됐다는 얘길 들었다. 침몰 100주년이 되는 2012년 3월 이 조선소 옆 부둣가에는 타이타닉 박물관이 세워져 관광명소가 됐다.
한 때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분쟁지였던 이 벨파스트의 얼스터 박물관에서 9월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신한대 ’탈분단 경계문화연구원’(최완규 원장)이 경기도와 공동으로 컨퍼런스(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평화 프로세스와 경계의 역동성: 아일랜드와 한반도’다. 컨퍼런스에는 북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큰 평화 시위를 이끌어내는 등 평화운동에 헌신해 197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메어리드 코리건 맥과이어(74)가 참석했다. 그는 국내 여성평화운동단체들과 국제적인 여성운동가들이 한반도평화를 위해 함께 조직한 ’비무장지대걷기(위민크로스디엠지)’에도 참여하고 있다. 또 기조연설은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 참여한 협상가이자 ‘분쟁’ 전반에 관여해온 학자이자 정치적 활동가인 션 파렌 전 북아일랜드 자치부 장관이 맡았다.
아일랜드의 식민과 분단-피의 투쟁과 보복의 악순환
수백년간 영국의 식민지 상태였던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아일랜드 ’자유국’의 설립을 계기로 아일랜드 섬도 남북 분단의 길을 가게 된다. 남부 아일랜드의 ‘아일랜드 자유국’은 1949년 영연방을 탈퇴해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분단 이후 아일랜드 섬은 한반도처럼 전면전을 겪지 않았으며, 남북의 대립도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 아일랜드는 달랐다. 북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적인 갈등이 중첩되면서 독립과 (남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둘러싸고 내란 수준의 갈등이 계속됐다. 일종의 내부분단으로 이중의 분단인 셈인데, 북아일랜드의 개신교 합병주의자와 충성파(인구의 약 60%)는 영국과의 통합을 지지했으며, 가톨릭 민족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인구의 약 40%)는 독립과 남부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통일을 지향하면서 충돌하는 정치적 균열구조가 고착됐다. 영국은 개신교 합병주의자를 지원했으며, 양 세력은 모두 무장 조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아일랜드공화군’(IRA)은 아일랜드섬의 통일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총성은 그치지 않았다.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Derry) 시위에서 영국군의 무력진압으로 13명의 시민이 사망한 ‘피의 일요일’ 사건, 1981년 공화주의 민병대원들이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사건 등 희생은 또 다른 투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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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갈등이 중첩되면서 독립과 (남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둘러싸고 내란 수준의 갈등을 보였던 북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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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아일랜드-탈식민과 탈분단의 평화과정 비교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연구해 온 구갑우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아일랜드 섬과 한반도의 탈식민적 탈분단적 평화과정 비교하기’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그에게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아일랜드 섬과 한반도는 ’식민과 분단’에서 매우 의미 있는 유사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그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정책학자인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한 것으로 모델로 삼아서 조선을 ‘일본의 아일랜드’로 불렀다. 전후 도쿄대 총장까지 지낸 야나이 하라는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을 제안했다. 실제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아일랜드처럼 자치와 독립을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스코틀랜드처럼 병합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 했다.
또 다른 유사점으로 구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가 남한의 헌법 3조에 명시된 영토조항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이 조항은 남아일랜드인 아일랜드공화국의 헌법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아일랜드공화국 헌법 2조는 아일랜드공화국의 영토가 아일랜드섬과 부속도서, 영해로 규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북아일랜드의 내부분쟁과 독립을 둘러싼 갈등에서 독립을 반대하고 영국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신교 세력들이 개정을 요구하는 핵심 현안이 돼 왔다.
구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남북 아일랜드가 통일과 연합 내지 연방을 상상하는 과정은 ’탈분단’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굳이 통일이라는 말 대신 탈분단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그건 통일이 정치구호로 오염돼 있고 현실과 유리된 당위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통일에 앞서 평화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의 민족주의가 우리 안의 그들과 우리 밖의 그들을 배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아일랜드가 엄청난 희생 속에서 이뤄온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갈등 행위자들의 공존을 추구하는 평화과정’이 필요하다. ’남북이 평화공존의 길을 갈 수 있다면, 통일의 길은 일종의 열린 미래’로 놔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일랜드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번 심포지엄을 주관한 신한대 탈분단 경계 문화연구원의 최완규(67) 원장의 문제의식도 같다. 그는 북한연구학회 회장, 정치학회 부회장, 국제정치학회 이사 등을 거친 정치학계와 북한학계의 원로 가운데 하나다. 그 역시 한 인터뷰에서 통일이라는 말 대신 ‘탈분단’이라는 개념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통일 주장에 앞서 강고한 분단체제의 모순과 실체를 드러내, 역사 화해를 포함해 남북의 화해협력을 모색하고 평화와 공존 체제를 다져나가는 게 먼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 원장은 남북한의 이질성으로 인해 통일을 얘기할수록 더 크게 갈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통일을 잊어야 통일의 길이 열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뒤 통일은 몇십년 뒤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가까워진 남북 멀어진 통일’의 역설인 셈이다.
평화과정과 경계의 역동성을 주제로 한 이번 세미나에서 장경룡 광주여자대학교 교수가 남북관계에서의 갈등, 갈등해소, 협력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 교수는 남북관계의 본질을 다루는데, 그는 우선 이것을 “만성적 갈등, 숙적 관계, 전략적 대립, 고질적인 갈등 관계 등 장기 갈등에 관한 주요 이론들을 통해 분석한다. 예를 들어 만성적 갈등, 숙적 관계, 전략적 대립, 고질적인 갈등 관계를 검토하며, 정책결정자의 인식, 제도화된 의지, 편향된 대처 등으로 인해 남북이 장기 분쟁적인 구조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장 교수 역시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의 문제라는 접근 즉 통일이라는 관점 보다는 보편적인 개념인 갈등해결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한 모두 통일문제에 집착하기보다 먼저 갈등해소, 교류와 협력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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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 벨파스트의 얼스터 박물관에서 열린 ‘평화 프로세스와 경계의 역동성: 아일랜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컨퍼런스(국제학술회의)에서 197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메어리드 코리건 맥과이어(왼쪽 74)와 토론회 사회를 맡은 나종일 가천대 석좌교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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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평화협정’-갈등 전환과 권력 공유
한반도와 달리, 북아일랜드는 1998년 ‘성 금요일협정’(일명 굿프라이데이협정, GFA)이란 평화체제에 도달했다. 이 협정의 핵심은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통일아일랜드가 될 것인가는 북아일랜드 주민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미래의 결정’으로 미룬 데 있다. 마찬가지로 이 성 금요일협정은 남부의 아일랜드공화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2조를 개정하는 계기가 됐다. 영토조항을 폐기하고 아일랜드섬에서 태어난 주민에게는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조항을 완화했다. ‘멀어진 통일’인 셈인데, 그 대신 북아일랜드 내에서 갈등해 온 정치세력들간의 권력 공유(분점)와 남아일랜드(아일랜드공화국)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협력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합의함으로써 평화 프로세스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다극 공존형 권력 분점 정치 구조는 이 협정의 핵심이었다. 영국 리버풀 대학교의 조나던 텅교수는 ‘북아일랜드의 다극공존형 권력 분점: 성공 혹은 실패?’라는 발표에서 이 핵심 합의가 평화 정착에 기여한 바를 평가하고 있다. 이 권력 분점의 합의는 연립 정부, 공동체에 따른 비례 대표, 상호 비토(거부권) 인정, 그리고 공동체 자치 등 4가지를 기본 틀로 진행됐다. 텅 교수에 따르면 다른 지역들에 존재했던 다극공존 체제에 비하면 북아일랜드는 성공 사례의 하나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됐다. 권력 분점이 분쟁 당사자들로 하여금 평화협정에 조인하고, 공동정부 기구들과 공통의 정치과정에 힘쓰도록 설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로는, 갈등하는 당사자들의 상호인정 및 ‘흡수와 배제’의 배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에 대한 합의, 무장해제와 평화과정의 동시 진행, 미국과 유럽연합이라는 ‘양심적’ 중재자의 개입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텅 교수는 협정이 체결된지 내년이면 20년이 되는 시점에서도 정치적 분단이 약화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당지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지표들에 있어서 극명하게 분열된 두 개의 공동체는 아직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이 없다고 양극화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아일랜드의 발표자들은 권력 공유 모델이 과도적인 방식의 분쟁관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의 로빈 윌슨 교수는 그건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라는 보편적인 규범을 통해 추구해 나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의 평화프로세스가 한반도 보다 앞서 가 있는 건 분명하다. 평화 없이 통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평화 프로세스를 넘어서’를 고민하고 있었다.
벨파스트/ 글 사진 강태호 한겨레 평화연구소장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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