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7 05:00
수정 : 2019.02.2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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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6일 아침 8시20분(한국시각 오전 10시20분)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해 환영하는 베트남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곧바로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탔다. 동당/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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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트럼프, 2차 정상회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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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6일 아침 8시20분(한국시각 오전 10시20분)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해 환영하는 베트남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곧바로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탔다. 동당/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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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을 처음 만난 날은 2018년 6월12일이다. 분단국가 북한이 출현한 지 2만5469일째 되는 날이다. 다시 260일이 흐른 2019년 2월27일 두 정상이 두번째로 만난다.
25469와 260. 두 숫자의 차이에 한반도 평화의 명운을 짊어진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역사적 위상과 과제가 담겨 있다. 두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한결 수월했다. 처음 만나는 데 걸린 세월의 1%면 족했다. 다만 260일은, ‘1128일 전쟁’을 포함해 2만5469일 동안 쌓인 적대와 불신을 눅이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시간이다. 전쟁·적대·갈등의 세월이 길수록 화해·평화도 멀어진다. ‘모 아니면 도’라는 태도를 피해야 하는 까닭이다. 갈 길이 멀다.
두번째 만남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이뤄진다. 하노이는 전쟁에서 평화로, 적대에서 화해·공존으로 가는 길이 막히지 않았음을 실증하는 역사의 증인이다. 정상회담장으로 최종 확정된 것으로 알려진 메트로폴 호텔은 또 어떠한가? 하노이의 밤하늘에 미군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던 197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존 바에즈가 숨어든 지하 방공호를 품고 있다. 당시 ‘통 호텔’이라 불린 이 호텔 방공호에서 바에즈는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반대하는 이들의 성가인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르고 또 불렀다. 메트로폴 호텔은 숱한 생명을 삼킨 침략과 저항으로 얼룩진 전쟁, 화해와 성찰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목도한 역사의 증인이다. 1961~68년 미국 국방장관으로 베트남 침략을 설계·집행한 로버트 맥나마라가 응우옌꼬탁 전 베트남 외무장관과 ‘왜 전쟁에 빠져들었고, 빨리 끝내지 못했는지’를 되짚어 ‘또다른 과오’를 막고자 ‘잃어버린 기회’를 탐색한 ‘적과의 대화’가 처음 이뤄진 장소다.
맥나마라는 1997년 6월20~23일 첫 대화에서 길어올린 교훈을 둘로 압축했다. “적을 이해하라” “상대가 적이라도 최고지도자끼리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맥나마라의 교훈’을 따르려 나름 애쓰고 있다. 첫 만남의 성과를 토대로 두번째 만남에선 ‘정상국가 관계’로 가는 큰 한걸음을 내딛기를 기대한다.
첫 만남 이후 ‘상호신뢰’ 물꼬
‘합의 이행’ 비관·낙관 엇갈리지만
북미, 비난 자제하고 대화 지속
비관과 낙관이 엇갈린다. 일단 70년 적대국의 두 최고지도자가 만나 “포괄적이며 심도있고 솔직한 의견교환” 끝에 마련한 ‘센토사 합의’(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이행 실적이 초라하다. 첫 만남 뒤 김 위원장은 한국전 미군 유해 55구를 돌려줬고,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발사대의 영구 폐기를 위한 기초조처를 취했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이유로 가로막아온 국제 인도지원 단체들의 대북 지원에 세밑부터 아주 조금 물꼬를 터줬다. 그뿐이다.
그러나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비전이 담긴 센토사 합의는 파기되지 않았다. 살아 숨쉰다. 때이른 비관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반도는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체제”(문재인 대통령)에 뿌리박은 적대와 갈등이 소용돌이치는 비극의 땅이다. 한반도 냉전구조는, 대나무 숲처럼 뿌리가 서로 얽힌 네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①대결과 불신의 남북관계 ②한반도 문제에 깊이 개입한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 ③북한의 체제 생존과 억제력 확보를 위한 핵무력 추구 ④적대관계의 뿌리인 군사정전체제의 지속과 군비경쟁”이 그것이다. 초기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설계자이자 실천자인 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전 통일부 장관)은 “이 요소들은 상호의존성을 지녀 어느 한 요소만 분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포괄적으로 접근해야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조언한다.
센토사 합의는 넷 중 셋을 함께 제거하겠다는 북·미 정상의 약속문서다.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1항)은 ②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공동 노력”(2항)은 ④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3항)은 ③에 대응한다. ①은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분야 합의서’의 실천으로 이미 해소 작업이 시작됐다. 남북은 ② ③ ④ 해소 노력에도 보조를 맞춘다. 센토사 합의와 남북 정상선언이 온전히 이행된다면, 한반도 냉전구조의 네 기둥은 봄비에 녹아 새 생명을 키우는 얼음처럼 평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남·북·미 정상의 ‘3인4각 달리기’가 절실하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온갖 압박과 유혹에도 센토사 합의를 지켜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관론자와 낙관론자가, 전혀 다른 세계관과 이해관계에도 공감하는 게 하나 있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두번째 만남의 목적은 센토사 합의 4개항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마련하는 데 있다는 공통 인식이다. 이 자체가 첫 만남 이후 260일의 거대한 성취다. 궤도를 벗어나면 ‘평화열차’가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센토사 합의’는 살아 숨쉰다
냉전 해체할 1차 회담 합의 4개항
하노이에서 구체적 이행방안 마련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첫 만남에서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확언했다. 하지만 불신은 깊고 신뢰는 얕다. 1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빈 가방’을 들고 평양을 찾아 ‘모두 신고하라’고 압박했다. 북쪽은 “강도적 요구”라고 맞받았다. 불신의 늪에 가라앉던 센토사 합의를 ‘촉진자’ 문 대통령이 구해냈다.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가겠다”는 김 위원장의 약속이 명시된 ‘9월 평양공동선언’이 그것이다. ‘믿을 만한 제3자’는 적대 해소의 필수 촉매다.
선민의식에 찌든 미국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북한이 “미제 승냥이”의 북침 공포를 내세우지 않고 땅으로 올라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해를 넘겨서야 ‘기회의 시공간’이 열렸다. 미국은 북을 ‘합리적 행위자’로 간주했고, 북은 ‘미국식 대화법’에 호응하려 애썼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양국은 개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고, 지역과 서로에 대해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면서도 여느 미국인들과 달리 북을 ‘깡패국가’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한 모든 약속을 동시 병행적으로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1월31일 스탠퍼드대 강연). ‘동시 병행’은, 미국의 ‘선 비핵화’ 압박에 맞서 북쪽이 내세운 이행 원칙이다. 김 위원장은 새 협상 창구인 김혁철의 직함을 비건의 ‘대북특별대표’에 맞춘 ‘대미특별대표’로 정해 미국에 알렸다.
적대를 넘어 ‘남들처럼 지내기’
적이 단박에 친구 될 수는 없지만
두번째 만남 통해 관계 진전 기대
“상호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은 센토사 합의 이행의 강력한 추동력이 될 수 있다. 아직은 미약하다. 양쪽이 불신의 동토에 신뢰의 씨앗을 뿌리려 쟁기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적이 단박에 친구가 될 수는 없다.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의의 일방조처→상호 절제→교류협력 심화→새로운 내러티브와 정체성 창출 등이 필요하다(찰스 쿱찬, <적은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 친구가 되려면 우선 ‘남들처럼 지내기’를 배워야 한다. 셈속이 달라 다퉈도 총칼을 쓰지 않고, 재빠른 이해타산에도 예의를 갖추는, 세상의 숱한 ‘정상적 국가관계’ 말이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두번째 만남이 긴 적대를 뒤로하고 ‘남들처럼 지내기’에 나서는 큰 한걸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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