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않되, 적극적으로 ‘미국 공조’ 끌어내라
“문제를 해결하자면 미국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협조를 끌어낼 수단이 마땅치 않다.”피랍 한국인 희생자가 두 명으로 늘어나고 상황 악화가 예상되는 속에서 전문가들이 “출구를 찾기 어려운 답답한 상황”이라며 내놓은 진단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국제정치학자는 31일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국의 원칙은 ‘테러리즘과 타협은 없다’는 것”이라며 “미국에 인질 석방 노력을 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한다면 이는 난센스”라고 말했다. 그는 “내용적으로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하겠지만, 공식적으론 테러·납치집단과 거래를 하는 모양새는 피해야 한다”며 “그래야 미국도 한국 정부의 노력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미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려고 애를 써야 하지만, 이는 긴밀한 협의를 전제로 물밑에서 조용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정부가 미국과 교섭할 필요가 있지만, 드러내놓고 (협조를 요청) 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연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국민을 살리는 과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테러·납치 집단의 반인도적 행위를 정당화시켜 줘서는 안 된다”며 “(테러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의 ‘보이는 원칙’과 (피랍 한국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외교적 노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성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결국은 한국과 미국, 아프간 정부, 탈레반 등 4자 사이에 이익의 균형점을 찾아야 문제를 풀 수 있다”며 “어떤 형식으로든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전문가는 “테러 집단과의 거래를 연상시키는 ‘맞교환’ 형식이 아니라, 전투 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민간인은 우선 살려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문가는 탈레반에 협조하다 아프간 미군기지 감옥에 갇힌 비전투요원 출신 여성 수감자와 피랍 한국인들 가운데 여성 인질을, 서로 ‘인도주의’ 차원에서 우선 풀어주는 단계적 해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탈레반 쪽도 한때 이런 해법을 내비친 적이 있다”며 “유엔이 이 과정에 관여한다면 미국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익명을 전제로 “극단적인 경우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있는 한국군을 철수하겠다는 카드로 미국의 협조를 압박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사태가 장기화하며 피랍 한국인들의 생명에 추가적인 위해가 가해지면 한국에서 ‘미국 책임론’이 높아질 수 있어, 미국으로서도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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