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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민 분포 현황 한-중 수교 15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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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15돌 어제와 오늘
한국과 중국이 24일로 수교 15주년을 맞는다. 두 나라의 관계 변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적대적 관계’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서로의 정치경제적 이해가 다양한 분야에서 상생의 기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친근한 이웃으로 바뀐 두 나라 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본다. 편집자 교역액 19배·인적교류 36배 수치상 비약적 발전중 초고속 성장으로 경쟁치열 ‘초기 효과’ 빛바래
반한감정 극복 ‘전략적 동반관계” 확고히 해야 베이징 근교 순이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송아무개(47)씨는 올초 목돈이 필요해 왕징의 집을 내놓았다. 왕징이 베이징의 ‘코리아 타운’으로 알려진 곳이라, 처음엔 한국인들이 많이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집을 보러 오는 이는 죄다 중국인이었다. 지난해부터 왕징에서 집을 사는 사람은 대부분 중국인이란 얘기를 그때서야 들었다. 임자로 나선 이는 40대 중반의 중국인 변호사였다. 한국의 한 중저가 화장품 업체는 요즘 쏟아져 들어오는 환불 요구에 골치를 썩이고 있다. 관세를 물고 물건을 들여오는 탓에 가격을 다소 높게 책정한 게 화근이었다. 인터넷으로 한국에서 팔리는 화장품 값을 확인한 중국 소비자들이 사기 운운하며 반품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개중에는 가격비교표를 들이대며 중국에서 폭리를 취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 이도 있다고 한다. 15년 간 긴밀해진 한-중 관계는 우선 여러 통계로 확인된다. 수교 첫해 63억달러에 불과했던 교역액은 지난해 1180억달러로 19배나 증가했다. 같은 해 한-미 교역액 768억달러의 두 배에 육박한다. 올 상반기 한-중 교역액은 이미 740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올해 교역액은 15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한-일간 교역액의 합계를 넘어설 것으로 점치는 이들이 많다. 인적 교류도 끊임없이 확대됐다. 수교 당시 13만명에 불과했던 인적 교류는 지난해 480만명으로 36배나 늘었다. 이 가운데 390만명은 중국을 찾은 한국인들이다. 하루 평균 1만1천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한 셈이다. 현재 매주 800여편의 항공편이 한국 6개 도시와 중국 30여개 도시를 잇는다. 중국 내 한국 교민 수도 70만명으로 급성장했다. 내년 베이징 올림픽을 지나면 교민 100만명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중국 속의 한국’은 극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다. 한국이 수교 이후 중국에서 누렸던 ‘기회’가 점점 엷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돈과 기술, 중국의 시장이 빚어낸 ‘아름다운 시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삼성이나 엘지, 현대자동차 등 ‘중국 효과’를 만끽했던 대기업들도 이젠 활로를 찾느라 바쁘다. 베이징에서 교육사업을 하는 박아무개(40)씨는 “두 나라는 지난 15년 동안 서로 ‘필요한 것’을 사이좋게 주고받았지만, 이젠 이를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만의 기회가 아니다. 현대자동차의 한 임원은 “세상 어디에도 중국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무분별한 외자 도입을 막고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각종 입법에 나선 것도 한국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중국의 성장이 한국에 부메랑이 되어 날아오는 셈이다. 5천여개 기업을 거느린 한국상회엔 해마다 400~500개의 회원사가 연락을 끊는다. 중국 사회의 성숙과 자신감도 한국의 존재감을 위협한다. 중국의 대중문화 수준이 낮았던 때를 노려 대박을 터뜨렸던 ‘한류’는 2005년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을 정점으로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지난해 중국 당국의 심의를 통과한 한국 드라마는 4편에 불과하다. 한국 가수들도 에이쵸티(HOT)나 장나라 이후 뚜렷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류가 중국의 대중문화를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끄는 징검다리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심지어 요즘 중국 블로그 사이트에선 반한감정을 쏟아내는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대부분이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역사인식의 암초가 잠복해 있음을 보여준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는 자오란(35)은 “중국에서 한국을 멋진 친구로 보는 시각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며 “한국의 위상이 도전받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신뢰 바탕 자유무역협정 맺어야” 김하중 주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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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중 주중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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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22일 한-중 수교 15주년을 맞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막한 ‘동감한국’(다이나믹 코리아)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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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한국과 수교” 북에 미리 전해 대통령 등 3인만 알고 극비진행
주중대사 사직서 내고 협상 임해 1992년 4월 양상쿤 중국 주석이 김일성 북한 주석의 80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을 찾았다. 그는 김 주석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한국과의 관계에 변동이 있을 수 있다”며 한국과 수교 협상을 벌이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어 7월18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평양을 다시 방문해 김 주석에게 장쩌민 총서기의 구두친서를 전했다. 한국과 수교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주석은 한동안 침묵한 뒤 입을 뗐다. “중국이 그렇게 결정한 이상 그렇게 하십시오.” 대만은 수교 이틀 전 한국에 단교를 선언했다. 한-중 수교 회담 당시 물밑에서 협상을 지원하고, 초대 주한 중국대사를 지낸 장팅옌 중한교류협회 부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중 수교 협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엔 대만, 중국엔 북한을 다루는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중국은 당시 국가적 목표인 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위해선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이사국이며 스포츠 강국인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82년부터 한국에 대한 정책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며 한국과 교류를 강화했다. 수교 협상은 91년 11월 첸치천 부장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장관급 회의에 참석차 방한하면서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첸 부장을 만나 한-중 수교 희망을 피력했다. 중국은 이듬해 4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회의에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을 초청했고, 이 장관과 첸 부장은 조어대 국빈관에서 만나 관계 개선에 합의했다. 그해 5월부터 시작한 수교 협상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장 부회장은 최근 중국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수교 협상을 알고 있었던 한국 쪽 인사는 대통령과 외교안보수석, 외무부 장관 3사람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 쪽 협상단 대표였던 권병현 초대 주중 한국대사는 ‘부친이 병이 났다’며 사직서를 내고 수교 협상에 참여했다고 중국 언론들은 전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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