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13 19:37
수정 : 2015.08.13 22:17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 탈냉전 흐름 타고 동구권과 수교
노무현 정부 9·19합의, 북-미 절충 주도 북핵해결 단초
외교사를 돌아보면 한국 외교는 남북 분단과 대립을 넘어 주도적으로 평화공존의 대안을 제시하고 주변국들을 설득하고 나설 때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빛을 발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9·19 공동성명’의 채택 과정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핵 6자회담은 어렵게 출범은 했지만 북한과 미국의 대립으로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 등으로 지칭하는 등 불신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북한은 이런 미국에 ‘6자회담 참가 중단’ 등으로 맞서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주최국 중국과 함께 북-미 대화를 추동하고 북-미 간 대립 지점을 절충하는 등 적극 중재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200만㎾의 대북송전 제공 등이 담긴 ‘중대제안’을 통해 설득했고, 미국에 대해서는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 등 다양한 채널을 가동해 양보를 이끌어냈다. 9·19 성명의 문안을 놓고도 막판까지 ‘경수로 제공’ 문제에 북-미 간 의견을 좁히지 못할 때도 양자 사이를 오가며 북·미 모두의 체면을 살리는 방식으로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도 북핵 갈등 해결을 위한 기본틀로 인정받는 9·19 합의가 마련됐다. 당시 고비마다 적극적인 중재와 대안 제시로 외교 역량을 선보인 한국은 자연스럽게 6자회담 참가국들 사이에서 역내 위상을 인정받게 됐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소련 등 공산권이 붕괴하는 세계사적 격랑에 적극 대응해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사례로 꼽힌다. 당시 정부는 탈냉전의 기류를 활용해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유고 등 동구권 국가들과 잇따라 수교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90년에는 소련과, 1992년엔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미국과 일본 등 서방권에 편중됐던 한국의 외교가 이념과 체제를 넘어 전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도 이른바 ‘7·7 선언’ 등을 통해 평화공존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보냈다. 그 결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총리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 채택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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