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25 00:50
수정 : 2018.05.2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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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해양수산개발원 항만물류연구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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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해양수산개발원 항만물류연구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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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해양수산개발원 항만물류연구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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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가 화해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몇년 전 남북의 노력으로 성공한 작은 사업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2015년 초 겨울의 3차 나진~하산 시범 물류사업에서 러시아 석탄과 함께 중국산 생수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중국산 생수 10TEU(20피트 표준 컨테이너) 나진항 경유 부산항 도착’이라고 단신으로만 소개했다. 하지만 사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했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수익이 적은 석탄 대신 국내 기업이 투자해 중국 쪽 백두산 지역에서 생산하는 생수를 나진항을 통해 들여오자는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훈춘의 북-중 국경을 통과해 나진항을 경유, 부산항으로 오는 물류사업이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만 남·북·중·러 협력 틀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백두산 주변에서 출발한 이 생수의 여정은 검증되지 않은 물류 루트(경로)로 화물을 보낼 수 없다는 화주를 설득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눈이 내리는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북-중 접경지역에 도착한 생수는 중국 세관을 통과해 북쪽 원정리 세관까지는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기존 러시아 석탄 이외에 연락도 받지 않은 중국산 생수는 통과시킬 수 없다고 막았다. 이미 관련 정보가 러시아 쪽을 통해 북쪽에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 담당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해당 정보를 북한에 줬다’고 하고 북은 ‘받은 적이 없다’고 하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운송 선박의 나진항 입항 불허, 동절기 생수의 동파 위험, 폭설로 인한 원정리 세관~나진항 간 도로 운송 제한 등 문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북한 당국, 러시아 철도공사, 남쪽 당국의 입장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었다. 선박 지연으로 비용손실은 점점 커져가고 방북 기간은 연장이 불가한데 북쪽의 의사결정은 기약이 없다 보니, 주 화물인 석탄만 운송하고 생수는 포기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2~3일 안에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비밀 국외 전화, 생수 동파 방지를 위한 작업을 강구했다. 북한 세관 앞에 막혀 있는 생수를 일단 중국 물류창고로 옮기고 동파를 막기 위한 추가 작업으로 겨우 버텼다. 화물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비용을 물어내는 것은 물론 화주기업의 담당자까지도 피해를 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은 풀리지 않고 복귀를 하루 앞두고 방문단 내에서도 이제 포기하자는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 모두 저녁 식사 자리에 모였다. 마침 같은 식사 테이블에 남북이 앉게 됐다. 남쪽 담당자가 솔직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호소했다. “이 사업이 어느 쪽에 유리한지 또는 어느 정부에 더 도움이 되는지 따지지 말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우리 남북이 힘을 합쳐서 다음 세대를 위해 물류가 흐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언젠가 통일이 되고 나진항에 수백, 수천개 컨테이너들이 실리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면서 그 밑바탕에 우리 남북 선배들의 이 마음들, 이런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 거기에 미약하나마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자 가만히 듣던 북한 당국자가 자기 동료를 돌아보면서 “동무 당신은 일을 추진할 때 뭘 가지고 판단하네?”라고 물었고 “나는 사람을 보지”라고 응답을 하면서 “좋아! 내 한번 도와주갔어”라는 짧은 대답이 나왔다. 그 뒤에도 재통관을 위한 중국 세관의 협조, 러시아 당국자를 또다시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이어졌지만 부산항에 도착한 생수에는 ‘나진항 경유 기념 생수’라는 라벨이 부착될 수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남북이 서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게 된다면 위와 같은 백두산 생수 운송과 같은 고단한 과정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지로 인해 주변 열강들의 합의와 협력을 끌어내야 가능하다. 기본적인 것은 남북한의 신뢰와 이해에서 시작하지만 작은 물류사업 하나에도 중국의 협조, 러시아 설득이 필요했던 것처럼 주변국들의 협력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엄혹한 미·일 중심의 해양세력과 중·러의 대륙세력이 한반도에서 부딪히고 있는 150년 전 구한말을 재현한 듯하다. 주변 열강들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운전자가 되어 한반도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는 합리적인 판단을 통한 주변국의 협력과 남북의 신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결단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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