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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2 11:31 수정 : 2005.02.22 11:31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 “솔직히 안 만나고 싶었다”
이근안 교도소 면회 심경 홈피에 털어놔

“저 사죄가 사실일까?…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 연휴 다음날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을 고문했던 이근안 전 경감에게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보도했다. 김 장관이 총선때 학력 위조로 실행을 받아 여주교도소에 복역중인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던 길에 이씨를 비공개로 만난 것이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의 귀띔으로 언론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김근태와 이근안 ’악연중의 악연’


“민주화되면 내가 고문대에 서 줄 테니 그때 복수해라”

두 사람의 지난 85년 첫 만남은 악연이었다. 이근안과 김근태는 85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경찰과 고문피해자로 만났다. 이근안 전 경감은 김근태씨를 상대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OO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스러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을 장담했지만 이근안싸의 고문 사실은 88년 <한겨레>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도피에 들어간 이근안씨를 언론은 추적했지만 아무 단서를 찾지 못했다. 10년의 도피가 넘어서면서 고문경관 이근안의 생존 여부 자체가 관심이었다. 이근안씨는 20년이 넘는 장기간 도피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 99년 자수했다. 이씨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세상은 민주화되었다. 고문가해자는 감옥에 갇히고, 고문피해자는 국회의원과 장관이 되었고 대권을 꿈꾸는 후보군이기도 하다.

신문들은 김 장관이 이 전 경감에게 “과거 갈등이 깊은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세월의 흐름속에서 과거의 원망이나 미움, 원한은 잊었다”며 “용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죽음 직전까지 몰고간 살인적인 고문을 하며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 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고 했던 사람을 만나는 심정은 어땠을까. 언론 보도대로 “과거 원망이나 미움, 원한은 잊었다. 용서하겠다”라는 말에 그 심경을 다 담을 수 있었을까.

김 장관은 21일 자신의 홈페이지(www.gt21.or.kr)에 ‘여주교도소를 다녀와서’라는 편지 글을 통해 이근안씨를 만났던 소회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김근태 “안 가고 싶었고 내키지 않았다”
“무릎꿇은 사죄에 ‘고맙다’했지만, 속까지 흔쾌하지 않았다”

김 장관은 “이근안씨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비서실에서 주의하지 않고 일정을 짜는 바람에 일이 어긋나서 이근안 씨를 만나게 된 것”이라며 “안 가고 싶었고 내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김 장관은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 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서 망설였다. 면회를 가야 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고 이씨를 만나기 전 고민을 털어놨다.

김 장관은 이근안씨를 만나고도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며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라고 심경을 전했다.

김 장관은 “(이씨가)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다”며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장관은 “내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솔직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김 장관은 이씨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동요를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김 장관은 “솔직히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며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티즌 “개인의 위대한 포용, 당신은 승리자”

김 장관의 고백에 네티즌들의 댓글이 잇따랐다.

김 장관 홈페이지에서 ‘팬’은 “그 참혹한 고문을 용서한다? 결코 김근태 개인이 용서할 일이 아니다. 역사에 맡겨야 한다”며 “그럼에도 김근태 개인이 용서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위대한 포용”이라고 격려했다.

‘북한산’은 “김근태님의 소신에 박수를 보냅니다. 고통을 당한 그 시대의 아픔은 온 국민들의 아픔이 아닐까요? 님의 진정한 용기에 가슴 뿌듯합니다”고 말했다.

‘김병두’는 “그 사람이 가식으로 사죄하는것 과는 상관없이 용서하신 순간에 진정으로 승리하신 것”이라고 위로했다. 아래는 김근태 장관의 ‘여주교도소를 다녀와서’의 편지 글 전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김근태 복지부장관] 설 다음날 여주교도소를 다녀와서

혼란스러웠다.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씨를 만나고 돌아와서 밤잠을 설쳤다. 그때 입술이 부르텄는데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태를 악화시킨 건 장영달 의원이었다. 내가 다녀온 다음 날쯤인가 여주교도소로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내가 이근안 씨를 면회한 얘기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언론에 귀띔한 것이었다.

설 다음날, 방송 카메라 기자들이 집으로 밀고 들어왔다. 첫 번째 온 기자들은 성공적으로 방어해 돌려보냈지만, 그 다음에 들이닥친 기자들이 막무가내로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이근안 씨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비서실에서 주의하지 않고 일정을 짜는 바람에 일이 어긋나서 이근안 씨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상락 전 의원을 설 전에 면회하자는 게 비서진의 생각이었다. 내 의견을 말할 사이도 없이 이의원을 비롯해 면회를 같이 할 사람들에게 이미 통지를 하고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면회를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민이 있었고, 면회를 가야할 합당한 이유도 있었다. 학벌사회인 이 나라에서 가난해서 진학 못한 것도 억울한데 선거에서 좀 과장했다는 이유로 의원직도 뺏고 징역까지 선고한 가혹한 법원의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는 의미에서도 면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근안 씨가 이 전의원이 있는 여주교도소에 함께 있다는 얘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부담스러웠다. 비서관에게 안갈 수 없느냐고 묻고,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 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서 망설였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어슷비슷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다. 지난 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솔직히 조금 아쉽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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