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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2 17:51 수정 : 2005.02.22 17:51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주의계열 54명 서훈 의미
"이념은 항거수단" 편협성 탈피
몽양 2등급 부여는 보수파 의식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54명에 대해 정부가 22일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기로 최종 확정한 것은 무엇보다 해방 이후 60년만에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계기를 찾았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좌파 계열의 독립투사들은 뛰어난 항일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해방 이후 60년 동안 조국으로부터 외면받았다. 이들이 이념적 이유 보다는 당시 활동지역(연해주·간도) 등 상황에 따라 일제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에 대한 서훈 추서는 너무 늦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병준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1930년대 이후에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계속했던 독립운동가는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주의 계열보다 수가 더 많다”며 “해방후 월북했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평가는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그렇지않은 중도좌파 인사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복권은 진작에 이뤄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에 대한 서훈은 우리 사회가 이념적 편협성을 탈피해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징표로도 해석된다. 국가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인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날 보충 설명에서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해야 할 방향전환”이라며 “이분들에 대한 포상은 정치분열로 발생한 이데올로기 투영을 지양하고 대한민국이 역사 진실에 더욱 가깝게 접근해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인 몽양 선생에게 건국훈장 1등급이 아닌 2등급을 부여한 것은 보수단체 등 사회 일각의 반대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대목이 남아있다는 징표다. 좌우합작의 우파쪽 영수로 활약했던 김규식 박사는 서훈 1급을 받은 바 있다.

신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여운형 선생의 경우는 관심이 집중돼 있고 포상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많아 너그럽게 하지 못하고 엄격히 규정에 따라 무기명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며 “이렇게 힘든 심사과정은 처음”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국가보훈처는 몽양 선생의 서훈을 북한에 있는 딸인 원구씨에게 전달하는 방안과 국내에 있는 몽양의 조카 여명구씨에게 주는 방안을 놓고 고심중이다. 한편 몽양 선생 추모사업회 쪽은 지난 17일 회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총회를 열어 ‘대통령장’ 서훈을 받을 것인지 논의했으나 찬반 논란 속에 안건을 이사회로 넘기기로 했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서훈 독립운동가 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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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22일 서훈을 추서하기로 의결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운데 주요 인사들의 면면과 주요 공적 내용이다.

건국동맹 결성 '광복' 대비

△여운형(1885~1947)=1918년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게 하는 한편, 국내에 김철 등을 파견해 3·1운동을 촉발시켰다. 임시정부 외무차장과 의정원 의원, 상해조선교민단장을 지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해 독립을 역설했고, 김구 등과 한국노병회를 조직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신문은 폐간됐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조국 광복을 준비했다.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징역 3년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옥고를 치렀다.

6·10만세운동 추진 옥살이

△권오설(1897~1930)=3·1운동에 참여해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지냈고,1925년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돼 활동했다. 1926년 천도교·학생 등과 연계해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상해서 저항운동하다 체포

△조동호(1892~1954)=1919년 신한청년당 이사로 선출돼 조선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하는데 관여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고, <독립신문> 창간과 한국노병회 등에 참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33년 국내 공산당 재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됐으며,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제주 해녀·농민운동 이끌어

△강창보(1902~1945)=1924년 제주도에서 신인회를 조직해 청년동맹으로 발전시키고, 1925년 조선사회운동자동맹의 창립에 참여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농민과 해녀 등의 권익보호와 반일의식 고취 활동을 하다 1932년 체포됐으나 탈출해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벌였다.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1943년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했다.

국치일 시위 벌여 징역6년

△구연흠(1883~1937)=구한말 관원 출신으로 1922년 무산자동맹회, 1923년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해 민족 계몽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의 간부로 6·10 만세운동의 추진에 관계했으며, 1927년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에 참여했다. 상해한인청년동맹 발기인,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한인지부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며 3·1운동, 6·10만세운동, 8·29국치일 등을 기념하는 시위를 전개했다가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6년형을 받았다.

상해임정 군자금 모금활동

△김재봉(1891~1944)=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책임비서로 전국에 세포단(細胞團)을 조직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징역 6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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