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등 쟁점법안은 반대수단 ‘남용’
‘자구심사’본래취지 잃어 해묵은 유물 “의사일정 제64항 근로기준법 일부 개정 법률안, 제65항 산업안전보건법 중 개정 법률안, 제66항 임금채권 보장법 중 개정 법률안, 제67항 장애인고용 촉진 및 직업재활법 중 개정 법률안, 제68항 근로자복지 기본법 중 개정 법률안을 수정한 부분은 수정한대로, 원안은 원안대로 각각 의결합니다. (땅땅땅!) 다음은 의사일정 제69항…” 지난 28일 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장에서 최연희 법사위원장은 부지런히 의사일정을 읽어갔다. 이날 최 위원장을 비롯한 15명의 법사위원들은 저녁식사를 비스킷과 떡으로 해결해가며 모두 94개의 안건을 처리했다. 정회시간을 빼고 실제 심의하는 데 든 시간은 10시간 정도여서, 법안 한 건당 심의시간은 7분도 되지 않았다. 토론은커녕, 의원들이 법안 내용을 살펴보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시간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선 배포된 법률안을 들춰보는 의원들이 드물었다. 정반대의 풍경도 펼쳐졌다. 이날 핵심 쟁점이었던 행정도시건설특별법에 대해선 하루종일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다. 여야는 이날 오전과 오후에 걸쳐 이 법을 놓고 ‘위헌성’ 공방을 벌였지만 단 한 치도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법사위는 2일 본회의 직전에 다시 전체회의를 열어 이 법을 논의하기로 했다. 법사위의 이런 상반된 모습은 하루이틀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법안들이 ‘일사천리’ 식으로 법사위 소위와 전체회의를 거치는 한편, 민감한 몇몇 법안에 대해선 ‘결사저지’의 몸싸움이 자주 벌어진다. 국가보안법 폐지안 상정을 막기 위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법사위 회의장 장기농성과 법사위 장기공전으로 상당수 법안들의 본회의 의결이 늦어진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양상이 벌어지는 것은 현행 국회법의 규정 때문이다. 국회법에서는 모든 법안은 해당 상임위를 거쳐 국회 본회의로 가기 전에 법사위에서 법안으로서의 체계와 자구 심사를 반드시 받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법사위가 ‘체계와 자구 심사’라는 정해진 책무와 권한을 넘어, ‘법안의 본질적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데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문제 있는 법안은 법사위에서라도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이미 해당 상임위에서 법안에 대한 심의를 마친 마당에 굳이 법사위가 ‘상원’ 구실을 할 이유와 근거가 어디 있느냐”라는 주장이 거세다. 국회 전문가들은 나아가 현행 국회법에 정해진 법사위의 기능 자체가 ‘해묵은 유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서복경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은 1일 “법사위에 법안 체계와 자구심사 기능이 부여된 것은 제2대 국회 때인 1950년대부터”라며 “의회 안에 법률 전문가가 드물던 상황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제도”라고 설명했다.
서 연구관은 “상황이 바뀐 지 이미 오래이므로, 법사위가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거나 법안 처리 반대의 장으로 쓰이는 비효율성을 고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라고 전했다. 그는 △법안의 체계와 자구 심사 기능은 법사위가 아닌 국회사무처의 법제실에 맡기는 방안이나 △별도의 법제위원회를 만들되 중요 법안에 대해서만 체계·자구 심사를 선택적으로 맡도록 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법사위와 비슷한 제도를 갖춘 것으로 꼽히는 폴란드나 스위스 등에서도 입법위원회나 법안기초위원회를 ‘선택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동철 열린우리당 의원도 최근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 기능을 법사위에서 떼어내 국회의장 산하의 별도 기구에 맡기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낸 바 있다. 법사위만이 아닌, 전체 상임위원회 운영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유정복 한나라당 제1정책조정위원장은 이날 “법사위가 하루 수십개의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매달 일주일만이라도 모든 상임위원회를 상시적으로 열어, 법안을 한꺼번에 몰아서 처리하는 문제점을 바로잡도록 국회법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준범 류이근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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