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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7 19:39 수정 : 2005.03.27 19:39

26일 오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안중근 의사 연구의 권위자들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왼쪽)과 김영호 국제안중근연구회 이사장이 대담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안중근 유해찾기, 동북아협력 계기로”

3월26일은 95년 전 중국의 뤼순감옥 형장에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날이다. 바쁜 일상이지만 한번쯤 옷깃을 여미며 그 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오늘의 한-일 관계, 나아가 동북아시대를 내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26일 오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과 김영호 국제안중근연구회 이사장을 만나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최 이사장은 안 의사 연구의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중근 숭모회 이사를 겸하고 있는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일찌기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21세기 한-중-일이 공존할 수 있는 사상의 원형이 존재한다고 강조해 왔다.

중국선 한족·조선족· 공동 추묘열 후끈
발굴땐 남북합의 바탕 중국등 발맞춰야
북핵문제 풀기 등 새 해법 제공할 수도

사회=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95주기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안중근을 말하는가? 안중근의 재평가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최서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어떻게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른 민족주의와도 조화롭게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한 기본을 담고 있다. 민족주의의 성화이자 그 극복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영호= 지금 안중근에 대한 새로운 붐이 일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제2의 안중근 르세상스다. 23일 중국 다롄에서 조선족, 한족을 아우르는 안중근 기념사업회가 행사를 했고 25일 안중근 기념사업회 심포지움, 26일 안중근 추모회 기념행사가 열렸다. 과거의 안중근 붐이 주로 어떤 애국주의자, 민족주의자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국제 평화주의자로서의 안중근, 동북아 협력과 평화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동양 평화주의자로서의 안중근이다. 여기엔 최서면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자료 발굴이 큰 공헌을 했다고 본다.

사회=새롭게 발굴된 자료는 어떤 것들인가?


=안중근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자료도 있다. 예컨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이석태한테서 당시 돈으로 거금이라 할 수 있는 백원을 받았기 때문에 거사가 성사됐다고 술회했는데, 한 마디로 이석태라는 사람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석태는 그에 그치지 않고 안 의사가 재판받고 있을 때도 ‘우리는 바깥에서 뭐 하고 있느냐’며 맹렬한 의병활동을 벌였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 알게 됐다. 이는 그 당시 한국(조선) 민중이 얼마나 안 의사와 뜻을 같이 했는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런만큼 일본정부가 얼마나 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는지도 보여주는 것이다. 안 의사는 일본의 조선병합을 반대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있는데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이 만사를 제쳐놓고 하얼빈에 가서 한 달이상 머물며 법원장과 정기적으로 만나 재판대책을 협의하고 있는 것이 나온다. 또 1908년에 미국에서 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친일파였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독립운동가 전명운 선생이 저격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는데 미국이 일본의 요청을 거부하고 전 선생을 풀어주자 그 사건 자료를 치밀히 검토하는 등 만반의 대책을 세웠다고 한다. 또 전명운 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 의사를 만났다는 자료도 있어 두 사건을 재조명해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다.

이토저격 배경등 새 자료 나와

▲ 김영호 국제안중근연구회 이사장
=제2의 안중근 붐은 새로운 자료발굴과 함께 오늘의 동북아 정세가 안중근적인 사상을 절실히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이른바 ‘공자 프로젝트’를 통해 이른바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지역에 화교경제권의 발전을 꾀했는데 동북아에는 이제 ‘안중근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의 동북아론은 한중일 각각이 서로 주도권을 쥐고, 서로 허브가 되려고 하는 모습인데, 안 의사는 그 옛날에 다자주의적 동북아 평화와 건설론을 만들어냈다. 안중근 유해발굴이 그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최 원장과 함께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안중근 유해 발굴을 위한 현장조사를 했는데 중국 공산당의 허가와 안내를 받아 공식적으로 뤼순 감옥에 갔다온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유해를 발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봉환할 것인가는 사실 다음 문제이고 발굴조사에 대한 남북한과 중국, 필요하면 일본도 참여해서 협력해 나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남북한과 중국 등 동북아에서의 협력 계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최서연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
=과거에도 유해발굴을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열의에 비해 방법론 측면에서 잘못된 것이 많았다. 그동안 언론의 보도를 보면 일단 찾으러 간다는 기사가 있고, 또 갔는데 찾을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절대적으로 찾을 길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 모든 것이 방법론에 귀착하는데, 현지에 가면 뭔가 정보를 얻기가 쉽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먼저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중요하다. 안 의사 연구를 한다고 알려지자 우연히 당시 뤼순형무소 소장있던 딸이 보관해 오던 여러 자료를 넘겨줬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형무소 소장이지만 죄수인 안 의사를 얼마나 존경했지도 얘기했다. 그 자료 가운데 두 장의 사진이 있는데, 하나는 안 의사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해 죄수들 가운데 사망한 이들을 추도하는 법어회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지점에서 뤼순 감옥을 내려다보고 찍은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죄수들이 묻힌 곳과 감옥으로부터의 위치를 처음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 묘역 추정위원회를 조직해서 회원들이 여러번 다녀왔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중국정부의 공식허가를 얻어 구체적인 조사를 했으며, 전문적인 측량을 통해서 북위 38도49분3초, 동경121도15분43초까지 그 위치를 추정해 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정부도 나서서 그 나름대로 판단을 했다고 보며 중국 정부에 남북이 합의를 하면 조사와 발굴에 협조해 달라고 한 것이다.

기존 발굴시도 방법론 틀려

=유해 발굴 그 자체도 꼭 해야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발굴을 추진하는 과정 역시 참 중요하다. 한국과 북한과 중국이 어느 누구도 혼자는 못하는, 적어도 이 세 정부는 공동으로 해야만 되는, 그리고 공동으로 추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아니지만 일본의 역대 중국대사를 지낸 분들과 중국과의 사업을 하는 일본 기업인들이 모여 현대중국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한다. 그 자리에 초청받아서 안 의사의 유해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하니까 그 가운데 대사를 했던 분이 일본 사람이 묻었으니 일본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양심있는 일본인들의 ‘속삭임’이라고 본다.

=길 가다가 새끼줄을 잡아 당기니까 황소가 끌려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안 의사 유해발굴이 동북아의 안중근 프로젝트, 나아가 ‘안중근 플랜’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지금 핵문제 이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에 대해 마샬플랜이라고 하는데 마샬플랜은 냉전의 도구였다고 북한 등이 반발한다. 우리는 이를 ‘안중근 플랜’이라고 부르면 된다. 당시 안 의사가 조선의 식민지화문제, 혹은 뤼순이 일본 지배 하에 놓인 문제를 단순히 어느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 평화의 문제로 본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북한 문제는 동북아 문제이며, 다자주의적 문제다.

사회=중국의 협력이 필요한데 중국 역시 안 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해왔다고 들었다. 중국도 긍정적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시아공동체 비전 ‘원조’

=안 의사 의거 당시 중국의 <민보>라는 신문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사람하고 중국 땅인 하얼빈에서 만나서 중국 땅인 만주를 처리하려고 한 제국주의적 발상을 거론했다. 그리고 안 의사의 거사는 조선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인들의 정세인식의 부족을 탓한 이 신문은 며칠 뒤에 발행 정지를 당했다. 또 하와이에 있는 중국 교포신문은 “중국 사람은 다 죽어라. 우리가 조선의 10배나 많은 인구가 있는데 그 안에 하나의 안중근을 못 가졌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안중근 뒤를 따르라”고 쓰기도 했다. 이밖에 당시 학교에선 민족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계몽 연극을 많이 했는데 저우언라이의 부인이 안 의사의 의거를 다룬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쏘다’에서 안 의사 역을 맡았다. 그 뒤 북한에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 시사회를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 할 때 주은래 수상이 이를 보고 “나는 안중근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수상이 “중조 인민의 진정한 연대는 안중근 의거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안 의사는 중국 5·4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5·4운동 핵심 구호가 조선 청년을 뒤따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안중근에 대해 중국 정부가 전반적으로 냉담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회=마지막으로 왜 지금 안중근인가를 한 마디로 한다면?

=어느 민족에게도 민족주의는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로 시작해서 민족주의로 끝나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다. 안중근이 보여준 것은 ‘민족주의적 국제주의’, 혹은 바깥에서 보면 ‘국제주의적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가 동양, 아시아라고 할 때, 지리적으로 인접성이나 예로부터 내려온 한자 유교문화 등의 공유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민의 연대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를 정립해야 한다고 본다. 안 의사는 평화와 경제 공동체로서의 아시아 건설의 비전을 최초로 세우고 거기에 장애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목숨을 내놓고 행동으로 앞장 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사회/강태호 기자, 정리/서수민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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