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교단절' 최악사태 막아야…미 긴박 '중재' |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이후일본의 미온적인 수사협조를 문제삼아 국교단절과 대사소환 등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던 한국정부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에 '중재'와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공개된 박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저격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측이 무성의한 태도를 드러내자 미국정부 관계자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전달하고 일본정부를 움직여 주도록 요청했다.
특히 정부는 주일 미국대사를 통해 당시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다나카 수상과 기무라 외상에게 한국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주도록 요청하는등 최악의 파국을 막기 위한 외교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인 흔적도 곳곳에 나와있다.
미측은 한국정부가 예상외로 강경한 자세로 나오자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어떠한 '돌발적인 움직임'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우려감을 표시한 뒤 한국정부의 구체적인 대응조치를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모습도 외교문서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실제로 하비브 국무부 차관보는 1974년 9월 4일 주미 한국대사의 대일 영향력행사 요청을 받고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한국정부 입장을 브리핑하겠다면서 "미국은 모두 우방인 두 나라가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조용히 일본측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라는 주문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가 미측에 영향력 행사를 주문한 것은 박 대통령 저격 사건을 대하는 일본정부의 무성의한 태도가 발단이었다.
8월 29일 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은 '과실살인'임에도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정부의 수사발표에 불만을 드러냈다.
'과실살인'이란 견해는 범행을 국가기관의 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국가 책임이성립되지 않으며 특히 일본인 공범의 행위는 개인의 행위로 일본정부의 부작위(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음)에 의한 범행이므로 책임이 없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다.
특히 일본정부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감정으로 양국관계가 최악의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 기업들도 대 한국 상담을 유보했다.
외무부는 일본의 이런 태도를 "일본의 지원없이 한국경제가 지탱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오만한 자부심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8월 30일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일본정부가 조총련을 불법화하거나 (상응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본정부가 조총련을 비호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강력 경고하는 등 일본의 태도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세광이 일본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에서 범행을 계획했으며, 총기도 일본경찰이 분실한 것인 만큼 법적,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논리에 따라 일본에 상응한 조치를 요구한 것이다.
앞서 주일 한국대사도 8월 24일 다나카 수상을 예방하고 일본의 적극적인 수사협조와 조총련의 정치활동ㆍ대남 파괴활동 기지화를 막을 대책을 촉구하는 내용의 김종필 국무총리의 친서를 전달했다.
때문에 정부는 다나카 수상의 답신(친서)에는 일본정부의 공식적 진사(陳謝)와조총련에 대한 철저한 조사, 암살 지령자인 김호룡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포함돼야하며 거물급 특사로 하여금 직접 박 대통령에게 전달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 아세아 국장은 9월 6일 주일 대사관 공사에게 다나카 수상의 친서는 김종필 총리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통보했고, 주한 일본대사도 9월 8일외교부 장관을 예방한 자리에서 "특사를 보내면 사죄사절이란 인상을 주기 때문에곤란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더욱이 일본대사는 9월 9일 김종필 총리에게 "일본은 사죄특사의 파견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친서에 저격사건 이외에 한일간의 다른 현안을 언급하는 것이 어떠냐"고 당돌한 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김동조 외교부장관은 9월 9일 에릭슨 대사대리를 만나, "다나카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 친서를 보내지 않는다면 주일 한국대사 소환, 장관 사표제출, 주일공관 철수를 단행하겠다고 일본대사에게 밝혔다"고 말했다.
한일간의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하비브 차관보는 9월 10일 주미공사에게 전화를 걸어 "친서 내용에 대해 한국이 너무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말아달라"고 진화에 나선 사실도 이번 문서 공개로 드러났다.
(서울=연합뉴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