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1.20 18:41 수정 : 2005.01.20 18:41

20일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우리 정부가 한국인 원폭피해자 구호를 위해 전담 병원을 설치하려 한 사실과 사할린 거주 동포의 귀환이 북한 정권의 영향을 받은 옛 소련의 반대로 무산된 과정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도 포함돼 있다.

■ 원폭피해자 구호 - 원폭치료병원 3곳 설립 추진

1974년 외교문서에 포함된 156쪽 분량의 ‘한국인 원폭피해자 구호’라는 문건을 보면, 정부는 당시 원폭피해자 치료를 전담하는 병원을 △전북 정읍 △전남 순천 △경북 경주 등 3곳에 세우기로 하고 세밀한 계획을 작성했다.

같은 해 11월25일자로 작성된 보건사회부 주도의 계획안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피해자 가운데 귀국 생존자와 그 가족의 치료를 전담할 현대적 종합병원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부는 3곳을 모두 합쳐 9만9천㎡(3만평)의 터에 총건평 6900평 규모의 병원과 직업보도소, 재활원을 두기로 했다.

당시 건물 신축비와 전문의 훈련경비 등을 합친 병원 건립경비는 모두 473만 달러로 추산됐다. 문건은 “전액을 일본국의 무상원조에 의하여 확보함”이라고 재원마련 방법을 적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일본 정부와 협상을 벌였는데, 우리 쪽은 “기존 경제협력이 아닌 인도적 사업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었던 반면, 일본 쪽은 “사업규모로 볼 때 경제협력 방식 외의 방법은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 계획은 결국 1979년 두 나라 집권당인 한국의 공화당과 일본의 자민당이 한국거주 피폭자에 대한 도일 치료 지원에 원칙적으로 합의함에 따라 무산되고 말았다.

■ 북-일관계 촉각 - “북 선수단 방일 막아라” 특병

당시 한국 정부가 북한과 일본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정치적 성격의 방문에 대해선 일본 입국을 저지하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외무부는 1974년 2월18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제2회 아시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강희원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 북한 선수단을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방침을 굳혔다”며 “일본의 강 위원장에 대한 입국 허가증 발급을 저지하도록 주일대사관에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강 위원장이 탁구선수단 단장 자격으로 입국하지만 평양시장이라는 그의 지위에 비춰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주일대사관은 북한 교육대표단과 조선민주여성동맹대표단, 조선과학문화대표단 등 비정치적 성격의 북한 대표단 일본 방문에 대해서도 일일이 동향보고를 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웠음도 밝혀졌다.

■ 재사할린 동포 귀환교섭 - 소련, 북한 의식해 협상거부

149쪽 분량의 관련 문건을 보면 일제시대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된 동포 201명에 대한 귀환 교섭은 1974년 1월22일 일본정부가 주일한국대사관에 명단을 제시하고, 한국이 이들을 전원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정부는 관계기관 간 협의를 거쳐 5월8일 입국 허가를 통보했다. 일본은 옛 소련과의 교섭을 미루다가 10월초부터 한달간 접촉을 했지만 예상 밖으로 소련 쪽이 이를 거부해 협상이 무산됐다. 소련정부는 “한반도에 있어 유일 합법 정부인 북한 외의 정권과 관련된 문제는 일본정부와 교섭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소련 쪽의 거부의사를 한국에 전달한 일본 외무성의 세오 북동아과장은 “소련은 북한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귀환 무산은 결정적으로 북한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구두로 전한 것으로 돼있다.

비밀문서에는 또 일본이 사할린 동포 귀환 문제를 일-소 간 평화협정 체결에 이용하려 했고, 한국은 소련과 북한을 이간하거나 관계를 악화시킬 목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있다. 유강문 정광섭 기자, 연합 iguassu@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