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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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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늘 우리에게 헌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헌법문제는 중대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헌법이 최고규범으로서 실질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은 이제 정치영역을 넘어, 토지공개념, 행정수도 이전, 호주제, 국가보안법, 이라크 파병, 병역거부 등 인권·양심·경제·사회·외교를 포함해 체제 전반의 작동을 규정하는 실제의 제1규범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법치·헌법재판·사법적 안정을 강조하는 헌정주의가 다수결·시민참여·인민의사에 바탕한 민주주의와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소야대의 반복과 대통령 탄핵 등 불완전한 헌법체제가 야기한 정치적·사회적 비용 역시 지속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토록 중요한 헌법문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선택은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헌법과 일상을 유리시키는 ‘헌법무시=헌법성역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헌법의 비중과 구실에 비추어 이는 불가능하다. 둘째는 헌법(개정)과 헌정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헌법·사법만능주의이다. 이 선택은 민주주의의 축소 및 사법국가화 경향을 더욱 촉진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것이다. 셋째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방법을 통해 헌법문제를 개혁하는 전략이다. 헌법이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헌법적 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원칙이 헌법에 투영되는 ‘민주적 헌정주의’의 이상인 것이다. 첫째와 둘째 현상을 통과한 오늘, 이 셋째 대안이 갖는 함의는 매우 크다. ‘미래 만들기’로서의 ‘헌법 만들기’, 즉 어떤 헌법을 가질 것이냐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는 물음과 같다. 과거 극복은 열정과 투쟁으로 가능하지만 미래 건설은 사려와 지혜가 필수적이다. 한국의 민주세력과 시민사회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저항’에 들인 열정에 비해 (헌법과 제도의) ‘건설’에 들인 지혜가 놀랄 정도로 작았다. 후자는 늘 소수 정치엘리트의 탁상협상의 영역이었다. ‘민주화’와 ‘헌법화’의 내용·과정·주도세력 등의 단절은 한국 헌정체제가 지닌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렇다면 ‘민주적 헌정주의’ 비전은 어떻게 실현가능한가? 첫째로 시민성이다. 헌법 논의는 엘리트 프로젝트를 넘어 ‘시민화’ ‘사회화’해야 한다. 우리는 현행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민사회 배제가 초래한 사회적 비용과 불안정성, 삶의 질 하락에서 정녕 깊이 배워야 한다.둘째로 민주성이다. 헌법을 만드는 과정은 이념과 노선의 분열과 쟁투가 결코 아니라, 미래 비전과 구상의 합의와 통합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의 수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셋째로 부분성이다. 헌법은 불변의 절대 진리체계가 아니라 여러 사회적 가치와 이상의 부분적 혼합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은 사회개혁의 일부로서의 헌법개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로 현실성과 책임성이다. 헌법은 좋은 이상을 나열하는 도덕교과서가 아니다. 실제의 헌법 현실로 연결되지 않을 때 헌법 조문은 죽은 문서에 불과하다. 건국 이래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빠른 성취를 세계에 자랑해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집합적 삶은 편안하거나 넉넉하거나 고르지 않다. 헌법개혁은 좋은 사회를 위한 국가개조의 한 하위영역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도하다. 좋은 헌법이 곧바로 좋은 사회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행복과 평안을 위한 출발의 하나로 헌법문제를 우리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미래를 향한 정열과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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