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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0 19:12 수정 : 2005.01.20 19:12

■ 저격사건이 남긴 것

1974년 8월15일 터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한­일 관계를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1년 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 간에 조성된 긴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국내적으로는 박 대통령 주변 권력구도의 축이 차지철 경호실장 쪽으로 쏠리면서 79년 박 대통령의 피살로 이어지는 암투의 시발점이 됐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납치현장에서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 발견되면서 일본 정부는 원하든 원치 않든 김동운의 조사와 신병인도를 요청했으며 이는 한-일 간의 최대 현안이었다. 박정희 정권으로선 문세광과 관련된 일본의 법적·도의적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외교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특별대책까지 만들어 정권의 요구에 복무했다. 노신영 외무부 차관은 사건 직후 우시로쿠 주한 일본 대사를 불러 “일본 정부가 문세광에게 일본인 여권을 발급해준 것은 분명히 하자가 있다”며 발급 경위를 추궁한다. 일본은 처음엔 ‘재일한국인의 범죄로서 일본 정부는 법적·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나, 얼마 뒤 ‘도의적 책임까지 없다고 한 것은 지나쳤다’며 한발 물러선다.

일본 ‘납치’수사 결국 흐지부지
박정권 궁지 ‘탈출’
차지철 급부상…중정 무력화
궁정동 총성‘불씨’


그러나 한­일 두 나라는 결국 정략적인 타협을 택한다. 일본은 한국의 요구대로 수사에 착수하고, 한­일 협정 체결에 간여했던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하는 등 봉합을 시도한다. 미국도 한국 방위를 운운하며 한­일 관계를 더는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한국에 밝힌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죄에 가담한 김동운 등에 대한 수사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혹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한­일 양국이 사건 발생 이후 100일이 넘도록 수사를 했지만 결론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 이를 웅변한다. 한국은 당시 이 사건은 총련과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내렸지만, 일본은 ‘남한혁명을 위한 망상’에 사로잡힌 소영웅주의자의 단독범행이라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이런 차이를 묻어둔 채 한국은 판결확정 3일 만에 문세광의 사형을 집행하고, 일본은 5일 뒤 사건수사본부를 해체한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권력구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명 ‘피스톨 박’으로 통하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이른바 ‘차지철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그 뒤 별도의 정보라인을 운영하면서 중앙정보부를 무력화시켰다. 사건 직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옷을 벗으면서 위축된 중앙정보부는 몇년 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맞아 이에 저항하면서 갈등을 빚는다.

8·15 국립극장의 총성이 ‘10·26 궁정동의 총성’을 예고했다면 지나친 해석이겠지만, 급속히 민심을 잃어가던 박정희 독재권력은 임계점에 이른 차지철-김재규 내부갈등 속에서 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이번엔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에 의해 종언을 고하게 된다.

유강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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