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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이 지난 21일 밤 ‘뉴스데스크’를 통해 홍석현 주미대산가 ‘도청 녹취록’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문화방송> 화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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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권리보다 프라이버시 보호에 방점
‘X파일’ 사건으로 논란 점화
‘태산명동서일필’.
이른바 ‘이상호 X파일’에 관한 21일 밤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의 보도 뒤 나온 누리꾼들의 반응이다. 문화방송이 몇달간 보도를 미룬 것도, ‘두리뭉수리’ 보도가 나온 것도, 모두 알권리와 법 위반 사이의 고민과 관련돼 있다. 해당 테이프 제작 과정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문제는 옛 안기부 미림팀이 만들었다는 모든 도청 테이프를 보도의 ‘성역’안에 영구보존할 수 있게 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 도청 가운데 불법 아닌 게 없는 탓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해 청취할 수 없으며, 불법도청으로 알게 된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면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차례 지적됐듯이 언론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 고위 간부와 중앙 일간지 간부가 수십억원의 정치자금 제공을 논의하는 문제라면 알권리가 통신비밀보호법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성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테이프에 나오는 내용은 사적인 게 아니라 불법자금으로 선거에 개입해 국민의 참정권을 훼손하려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대화를 나눈 인물들의 명예권보다는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자유에 우선적 가치를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기부 도청테이프는 모두 적용대상?…불법대선자금까지 보호? 민언련도 22일 ‘국민 알 권리 위해 제대로 보도하라’는 성명에서 “MBC가 ‘X파일’ 문제를 놓고 보여준 혼선, 국민들에게 의혹을 부풀려 놓고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테이프를 보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과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보호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는 기준을 놓고 볼 때도 ‘X파일’은 제대로 보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법조계에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알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과 교수(형법)는 “보호되는 개인의 권리와 보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 가운데 무엇이 더 큰지를 고려한다면, 국가기관의 도청이나 정치자금 문제 등이 관련된 만큼 알권리가 당연히 우월하다”며 “언론기관이 우리사회의 비리나 불법 등을 고발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형법 310조에 따라 위법성의 조각사유가 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불법 도청 테이프는 불법 도청한 사람을 형사처벌할 일이지, 언론보도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며 “정보를 수집한 사람을 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는데, 이를 보도하는 기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도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때문에 법원이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해 보도범위를 제한한 것에 대한 비판도 많다. 고법의 한 판사는 “사안의 공익성 또는 중대성을 따져볼 때, 일단 방송을 전면 허용했어야 한다고 본다”며 “법원이 사전검열을 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또다른 변호사도 “보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언론의 권력감시에 더 초점을 맞춰 판단할텐데 법원이 사안의 경중에 비해 소극적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냈다. 테이프의 내용으로 정치인·기업인의 불법행위를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공익성’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명보도 안한다고 알권리 보장 못하는 건 아니다”는 지적도 그러나 가처분신청을 한 홍석현·이학수씨의 인격권도 존중해줘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조범석 변호사는 “보도내용이 국민적 관심사이고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인권문제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며 “제3자의 대화녹음을 법적으로 금지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멀리 내다볼 때 불법도청을 이용한 언론보도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도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1일 서울남부지법이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테이프에 나타난 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테이프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는 등의 방법으로 뉴스데스크나 후속 프로그램을 제작, 편집, 방송, 광고하거나 인터넷 등에 게시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결정한 것도 비슷한 취지다. 김종훈 변호사도 “법원이 방송 내용을 제한함으로써 사실상 삼성쪽의 신청을 ‘인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하지만 불법도청 테이프라는 점을 언론사가 인정하는 이상, 법원으로서는 그렇게 결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립적인 의견도 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언론법제)는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보도하라는 것도 무리”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문화방송은 이제 법원의 결정 범위 안에서 관련 내용이 갖는 의미를 충실하게 보도할 의무가 있다”며 “하지만 ‘알권리’ 차원에서 무조건 모든 것을 보도하라고 문화방송에 요구할 수는 없고, 실명을 보도하는 것만이 알권리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문화방송쪽이 법원의 결정 범위 안에서 관련 내용을 먼저 보도한 뒤, 관련자들이 보도 내용을 부인해 진실의 문제가 충돌하게 되면 입증차원에서 법적인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보도하는 것이 올바른 단계”라며 단계적 보도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참에 알권리-기본권 충돌 문제 사회의제화하자” 이번 사태가 알권리와 기본권 사이의 충돌 문제를 사회의제화해, 해결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민언련은 22일 성명에서 “이번 사건이 언론의 보도윤리와 공익의 추구, 개인의 프라이버시권 옹호 등 우리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사회적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만큼, 공론의 장에서 이 과제를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서중 교수도 “문화방송은 법적인 틀에 갇혀서 끌려다닐 게 아니라, 정면 대응에 나서 통신비밀보호법과 알권리가 충돌하는 문제 자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었어야 한다”며 “이번 논란을 계기로 언론의 보도와 충돌하는 기본권은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사회적 의제화하고,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언론계의 역할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통신비밀보호법은 92년 대선 직전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후보에 대한 관권 지원을 논의하는 내용을 정주영 후보 쪽에서 도청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발생한 뒤 1년이 지난 93년 12월 김영삼 정부 때 제정되면서 초원복집 사건이 도청 자료의 언론보도까지 제한할 수 있는 이 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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