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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정치자금 제공 주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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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직접지시’ 곳곳 드러나
정계 ‘관리’하려 적극 제공 흔적
‘기아차 인수’ 대가성 암시
<문화방송> 도청 테이프 공개를 계기로 삼성이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정치권에 수백억원대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해온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나아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력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해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정치자금 제공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나는 몰랐다”, “실무자가 알아서 했다”는 식으로 법망을 빠져나갔던 이건희 회장이 굵직한 사안들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게 됐다.
<문화방송>이 방영한 녹취록 내역을 보면 대선자금 지원과 관련해 이 회장의 ‘지시’라는 대목이 곳곳에 등장한다. “회장님이 몇가지 방침을 말씀하십디다”, “여러 사람 하지 말고 홍 사장을 계속 통하시라고”, “그 다음 사람은 누구를 통하느냐,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으시면서”, “회장께서 출국하시기 전에 지시가 있었기에 지금 마련 중이라고”, “이 얘기는 회장님과 우리 셋만 알아야 되는 사항”, “회장께서 떠나시면서 이 대표가 어려울텐데 도와드리라고 했다”, “회장께서 떠나시면서 저한테 집행(정치자금)하라고 하셨다” 등은 삼성 입장에서는 이 회장의 개입을 스스로 자백한, 가장 뼈아픈 대목인 셈이다.
삼성은 역대 정권에 걸쳐 많은 정치자금을 뿌려왔다. 특히 정권 교체를 앞두고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는 유력 후보들에게 수백억원의 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정치자금 문제로 법정에 선 것은 지난 96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 한번뿐이었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 때도 삼성은 여야 정치권에 385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으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만 불구속입건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 회장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대선자금을 제공한 심증은 있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당사자들이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조양호 한진 회장의 경우 대선자금 수사 당시 1심에서 한나라당에 20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치권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정치자금을 줬다는 ‘피해자론’도 명분을 잃게 됐다. 녹취록을 살펴보면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자금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고위 관료와 검찰 고위 인사 등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자금을 뿌려온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이학수 당시 비서실장은 유력한 모 대선 후보에 대해 “이번에 안되더라도 다음 정권에서 영향력이 있을 것이고…”라며 자금 지원을 하자고 했으며, 강경식 당시 부총리에 대해 “그 양반은 사실 내가 결정적으로 밀어 줬거든요”라고 말했다.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이 대표를 직접 만나서 ○○○을 최저 장관급 대우 또는 3선 이상으로 대우해달라고 해서 승락을 받았다”고 한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은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800억원의 무기명 사채를 사들인 사실이 드러났으나 385억원을 제외한 나머지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자금 역시 삼성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인맥 관리 등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정치자금으로 재판을 받을 때마다 “댓가를 바라지 않은 순수한 정치자금이었다”는 주장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드러났다. 기아차 처리 문제를 놓고 삼성이 정치자금을 대고 한나라당은 삼성 인수를 위한 유리한 여론을 조성해주는 주고받기 식의 거래가 이뤄졌다는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220억원,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50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해에는 2002년 대선자금의 규모가 밝혀졌다. 그러나 지난 92년과 97년 여당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대표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내역은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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