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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민원실 앞에서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왼쪽 두번째 뒷모습)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및 이학수 부회장, 홍석현 주미대사 등 20여명을 배임 및 횡령, 뇌물 혐의 등으로 고발하는 고발장을 내기에 앞서 보도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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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사과… ‘도청 테이프’ 새 국면
삼성과 <중앙일보>가 25일 사실상 안기부 도청 테이프 내용을 인정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함에 따라 안기부 도청 테이프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무엇보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삼성과 <중앙일보>가 테이프에 나오는 대화가 실제 있었음을 처음 인정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여론압박 밀려 후퇴… 진상규명 계기마련
구체 설명없이 임직원 명의 발표 부적절
삼성은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불법도청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 확인을 해줄 수 없고 실명을 거론해 방송한 <문화방송> 등 몇몇 언론사에 대해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테이프 공개의 파문이 예상보다 큰데다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사과문을 준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사과문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주재한 구조조정본부 팀장회의를 거쳐 결정됐다. 삼성은 사과문에 테이프 내용을 인정하는 문구를 분명하게 담지는 않았지만, 보충설명에서 홍석현 주미대사(전 중앙일보 사장)와 이학수 본부장이 당시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 등 대부분의 내용을 인정했다. 삼성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후보들을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를 벌였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점을 덧붙였다. 삼성 관계자는 “녹취록이 공개된 뒤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사실이 없다는 항의를 해왔다”고 말했다. 삼성의 사과문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대선 후보들과 검찰 고위층에 대한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제공의 세부 내역은 공개하지 않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민단체들은 일단 삼성이 대화를 나눈 사실을 인정한 것을 한단계 진전으로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던 점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한 진상 파악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과문을 삼성 임직원 일동 명의로 낸 것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행위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룹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임직원 명의로 사과문을 냈다”고 설명했으나 당사자인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풀이된다.
사실 삼성의 관심사는 언론사에 대한 법적 대응이나, 테이프 내용의 진실성 여부보다는 이건희 회장의 안위에 모아져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삼성이 정치권 등에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 회장은 참여연대가 고발한 대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과 횡령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경가법상 50억원 이상의 배임과 횡령은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이 회장은 지난 96년에도 회사 돈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드러나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삼성 관계자는 “사실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선에서 이번 사태를 막을 수 있으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삼성이 테이프 내용을 사실상 인정함에 따라 대화 내용의 진위를 가리고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한 사법처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받게 됐다. 구체적인 내용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여야 후보들에게 광범위하게 불법 정치자금을 뿌린 게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그러나 “녹취록에 나온 정치자금 가운데 일부는 이미 오래 전에 수사과정에서 나온 것도 있다”고 말했으나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전달된 자금을 말하는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중앙일보도 이날치 신문 1면에 ‘다시 한번 뼈를 깎는 자기반성 하겠습니다’라는 사설을 통해 사과하면서도 “도청 당사자들은 중앙일보를 매도하는 일부 방송·신문사들을 거명하며 ‘그들도 떳떳하지 못하다. 자기들은 정도를 걸어온 것처럼 하는데 정말 역겹다’고 증언하고 있다”며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불법도청 자체는 물론 도청 테이프에 담긴 모든 내용이 함께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해, 자기반성보다는 자기방어와 변명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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