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김대중납치' 반한감정 겹쳐 사과 거부"
"박정권, 저격사건 계기 핵개발 착수" 주장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해방후 한일관계상 가장 나쁘고 긴장됐던 문제로 양국간 국교 단절 직전까지 가게 한 사건은 이 사건밖에 없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당시 주한 일본대사관 정치부 1등 서기관이었던 마치다 미쓰구(町田貢ㆍ69.성균관대 초빙교원)씨는 2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우시로쿠 도라오(後宮虎郞) 주한 일본 대사는 대사관 직원들에게 철수 준비까지 지시했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98년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원장(공사)을 끝으로 퇴직한 마치다씨는"당시 일본은 한국을 납득시킬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연일 대사관 주변에서 데모가 발생할 정도로 한국내 반일감정도 고조됐기 때문에 우리 대사관은 한국측의 단교통보를 각오하고 통보만 하면 바로 1~2일내에 철수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일본은 전혀 단교할 생각이 없었지만 단교란 것은 한쪽의 일방통고만으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측의 통보만 오면 철수할 수 있도록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는 조총련에 대한 단속과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를 일본에 요구했지만 당시 일본내에서는 사회당ㆍ공산당 등 혁신계를 중심으로 언론까지 가세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고 치안 당국은 당국대로 한해 전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국을 괘씸하게 생각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국측 요구를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치다씨는 "일본 치안당국의 한국에 대해 품었던 괘씸한 감정은 당시 진행되던양국 치안 당국자간 접촉까지 일본측이 중단한데서도 드러났다"면서 "한국측이 수사와 단속을 요구하더라도 열심히 일할 마음이 들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당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사회당만 하더라도 북한의 일본인 납북사건 자체까지 불과 몇년 전에야 인정할 정도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때문에 한국 정부와 박 대통령을 향해 곱지않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 당국은 조총련을 시끄러운 단체로 규정, 사실상 방관만 하던 상황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 정부가 단속을 요청해도 `위법행위가있을 경우에만 단속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당시 외무상이었던 기무라가 자민당계 온건파였지만 사회당의 입장에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해력과 동정심이 부족했다는 점도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지적됐다, 마치다씨는 "기무라 외상은 당시 `문세광은 한국인, 권총은 일본에서 탈취해 간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피해자'라든지 `북한의 한국에 대한 위협은 없다'라는 발언을함으로써 한국을 격노케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 일본은 북한이 한국 공작을 할 때 일본을 무대로 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며 쉬운 방법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런 이유들로 단속을 제대로 할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격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일본이 한국에 대한 테러기지 즉, 대남공작기지가 됐다면서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던 차였기 때문에박정희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굉장히 화가 나 재차 단속을 강력히 요청했었다고마치다씨는 회고했다. 그는 "당시 나는 박 대통령이 `일본이 우방이냐? 이런 식이라면 국교를 단절할수 밖에 없다'면서 한국내 각 부처에 단교할 경우 미칠 영향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면서 "사실 여부 확인은 어렵지만 재경부가 단교하면 무역과 관광 등 경제쪽 피해가 매우 크다고 보고해 박 대통령이 단교를 단념했다는 정보도 입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일본측 입장을 납득하지 못했으며 육영수 여사 장례식장을 찾은 다나카 수상과도 굉장히 사이가 안좋았다"고 회고하고 "결국 일본이 한국측 입장을 이해해 시나 특사를 파견, 다나카 수상의 친서와함께 구두로 사과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다씨는 또 "그때 주한 일본 대사관은 한국측 입장을 잘 이해했고 이 때문에`한국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를 계속 본국에 올렸다"면서 "본국을 설득하기 위해 굉장히 고생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일 "정부가 공개한 박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문서에 미국이 당시 한일관계를 중재하면서 일본측 편에 섰던 것으로 나타난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미.일 관계는 항상 그랬다"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에 착수하는 등 한미간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저격사건을 계기로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 같은 한국측 움직임을 마땅치 않게 여겨 급기야 카터 대통령 때 주한미군 철군까지 이뤄졌다는 것이다. 마치다씨는 또 박 정권이 당시 저격사건을 기화로 한해 전에 발생했던 김대중납치사건을 덮으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저격사건은 표면에 드러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저격사건은 DJ 납치사건과는 전혀 별개로, 한일 양측 모두에서 두 사건을 연계시킨 분위기는 전혀 없었으며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저격사건 문제로 양측 외교가가 그만큼 긴박하게 돌아갔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큰 사건은 나타나는 것 그대로 처리해야지 다른 것과 연계시키면 오히려 일이 어렵게 돼 처리가 불가능해 진다"면서 "한국내 일부에서 혹시 그런 생각이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마치다씨는 지난 58년 일본 외무성에 입사, 한일 수교전인 지난 60년 9월 처음한국을 방문했고 수교전인 지난 63년 서울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지난 98년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주한 공관에서 근무한 한국통이다. 그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원으로 어문학부 교수직을 맡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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