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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7 19:13 수정 : 2005.07.27 23:10

이학수 실장 “부총리에게 3~5개 주라” 지시
삼성 금융사 기아차 대출금 회수 석달뒤 부도
10조 부실채권 여파 금융권 확산 환란 도화선


1997년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기아사태에 삼성이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당시 국가경제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한 삼성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정·관계를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펼친 삼성의 기아차 인수 과욕이 기아사태에 불을 지핀 것에서 나아가, 살얼음판을 걷던 한국 경제의 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외환위기 사태를 부른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도청 테이프 사건을 계기로 삼성이 지난 1997년 기아차 인수를 위해 정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로비를 벌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한 기아차 사태에 삼성의 과욕이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삼성자동차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의 모델을 살펴보고 있다.

삼성의 욕심이 화근? =기아차 인수를 둘러싼 삼성의 로비 작업은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공개된 안기부 도청 녹취록은 그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뤄졌는지 잘 보여준다. 도청 문건을 보면, 기아차가 자금난을 겪던 지난 97년 4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만나 강경식 신임 경제부총리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홍 사장이 “부총리에게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 실장은 3개에서 5개(3천만~5천만원) 정도를 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되어있다. 강 부총리는 94년 자동차산업의 중복 과잉투자를 우려한 관련 부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성차 공장의 부산 유치에 앞장서 ‘친삼성맨’으로 꼽혔다. 이 실장도 홍 사장과의 대화에서 “그 사람(강 부총리)은 내가 밀었다”며, 삼성에서 강 부총리의 뒤를 봐주고 있음을 내비쳤다.

삼성 금융계열사들은 이후 기아차에 빌려준 대출금을 거둬들이기 시작했고, 석달 뒤인 7월15일 기아는 사실상 부도를 맞았다. 연초에 터진 한보 부도 이후 외국투자자들이 자금 회수에 들어간 마당에 기아사태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기아의 부도가 준 충격은 컸다. 재계 순위 8위인 기아의 빚은 10조원을 웃돌았고, 이로 인한 부실 채권은 금융권 전체를 부실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은 그해 7월 말부터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추기 시작했다. 기아차의 전직 임원은 “당시 삼성 금융계열사들이 기일이 도래하지 않은 기아 어음을 돌리며 회수 작전에 들어가면서 종금사들도 앞다퉈 자금을 걷어들였다”며 “삼성의 ‘기아차 흔들기’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1997년 10월22일 과천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기아차 법정관리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

기아사태의 결정타로 작용한 제2금융권의 자금회수를 이끈 것은 삼성이었지만, 외환위기를 삼성과 바로 연결짓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채권금융기관 관계자는 “기아 사태는 본질적으로 무리한 투자와 방만한 외부차입에 비롯된 총체적 경영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송대 김기원 교수는 “기아부도가 외환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성의 기아차 인수 과욕이 기아사태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외환위기를 촉진시키는데 상당한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방위 로비와 외환위기=삼성은 당시 경제관료 뿐 아니라 여야 대선 후보에도 기아차 인수 로비의 손을 뻗쳤다. 안기부 도청 녹취록을 보면, 그해 9월 초 홍 사장은 “(기아차 인수와 관련해) 삼성이 갖고 있는 복안을 당당하게 밝혀 공론화시키면 당내 정책위에 검토시켜 도와주겠다”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이야기를 이 실장에게 전한 것으로 나온다. 앞서 홍 사장은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만나 “기아차 문제에 힘을 보태겠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이 실장한테 전한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이 29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앞서 기아차 인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정부와의 공조를 강조한 삼성의 내부 보고서가 폭로되고, 강 부총리가 기아차의 제3자 인수 방침을 시사하면서 삼성과 정부 경제팀의 유착 의혹이 커져가는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로부터 한달 뒤인 10월 정부는 ‘자구노력을 통한 회생’ 방침을 뒤집고 기아의 법정관리 방침을 결정했고, 기아 경영진과 노동계는 “3자 인수를 통해 기아를 삼성에 넘기려는 음모”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때까지만해도 정·관계와 언론을 통한 삼성의 전방위 로비는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아차 해법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기아사태는 장기화하고 국가신인도가 추락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11월 초에는 이미 외화 유출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결국 같은 달 21일 대외신인도 하락과 외환보유고 고갈, 이에 따른 유동성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고 말았다. 삼성차를 앞세워 자동차사업의 꿈을 키워온 재벌 삼성의 기아차 인수 욕심도 노동계의 거센 반발과 삼성에 대한 불리한 여론, 다른 완성차업체들의 반발 등에 부닥쳐 표류하다가 98년 10월 공개입찰 방식으로 기아차가 현대차에 넘어가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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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에 2조원 퍼부울때 기아엔 3천억도 안줬다”



기아는 외환위기 직전 삼성과 정부의 합작에 의해 무너졌는가?

1997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기아는 무리한 투자로 기아특수강, 기산, 아시아자동차 등의 경영부실이 겹치면서 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허덕였다. 당시 기아의 매출액이 12조원이었는데, 부채가 12조원이었다. 4월부터 제2금융권의 자금회수가 시작됐다. 5월 제2금융권의 기아 어음 결제물량은 하루 1500억원에 이르렀다. 기아는 채권단에 3천억원의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김선홍 회장이 강경식 당시 재정경제원 부총리를 찾아가 지원을 호소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기아의 한 전직 임원은 “1년에 2조원 가량을 지원해줬던 대우차와 비교해 볼 때, 채권단이 기아에 대해선 지나치게 인색했다”며 “기아특수강 등 3개사를 정리하고, 이들 회사에 대한 기아차의 보증채무를 털어주면 기아차는 독자생존이 가능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결과적으로 기아차 매각 때, 기아그룹 부채의 절반 이상인 7조1700억원의 부채를 탕감해 줬다.

 기아차 전 임원들은 채권단의 태도변화도 지적했다. 7월22일 채권은행단은 김 회장의 경영권 포기각서를 전제로 기아에 16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2일에는 임원진 전원 사표제출을 요구했다. 기아의 한 전직 임원은 “당시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에는 (사후 성격의) ‘경영권 포기각서’ 요구가 일반적이었는데, 기아에 대해서만 (즉각) ‘사퇴서’를 집요하게 요구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정부와 채권단은 처음부터 독자생존이 힘들다고 보고, 법정관리와 매각을 염두에 뒀는데 기아가 계속 독자생존을 강조해 일단 김 회장을 내보내야 처리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정부-채권단과 기아는 이판사판 격의 감정싸움에 들어간다. 8월4일 채권단 자금지원 거부, 8월8일 전 시중은행 기아 수출신용장(L/C) 매입 중단 등으로 기아차는 내수·수출이 모두 막혔다. 기아도 경영권 유지를 목표로 기습적인 ‘화의’ 신청으로 정부 심기를 거슬렀다. 정부와 채권단은 9월29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당시 기아는 국민기업론으로 맞서고 이회창·김대중 대선후보들과 시민단체들이 합류해 간극은 더욱 커졌다. 기아의 강한 반발에는 강경식 부총리가 기아차를 삼성에 넘기려 한다고 의심한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강 부총리는 삼성차 부산유치위원장을 지냈고, 재무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에는 홍석현씨가 그의 비서관과 보좌관을 맡는 등 삼성과의 친분관계가 남달랐다. 강 부총리는 그해 8월26일 국회 재경위 답변에서 “정부는 기아의 제3자 인수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민간)시장에서 제3자 인수가 일어날 경우 정부가 막을 순 없는 입장”이라고 말해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기아차 실무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강만수 전 재경부 차관은 “부총리가 어떤 생각을 했는진 모르지만, 당시 김영삼 대통령뿐 아니라 여야 모두 기아를 부도내지 말고 지원하라고 해, 기아차 지원에 부정적이었던 부총리로선 ‘채권단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원론적 얘기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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