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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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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도청 테이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고심하고 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를 찾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여론조사가 행해지고 다양한 해법들이 나오고 있다. 그것들은 크게 보아 덮어두자는 것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 또는 그 새 중간의 방안들이지만 대세는 내용 공개 쪽인 것 같다. 반세기 지배구조 극명 반영 그 가운데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해서 처리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사생활 등 공개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 때문에 걸러내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기구가 국민을 대신해서 내용을 파악하고 짚어야 할 사항들만 공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건전한 상식을 유지하면서 탈법행위에 대처해 가자는 제안이다. 우리 국민은 지금도 이렇게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인격을 감싸기 위해 고심하면서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한 줌의 이권을 위해서 법이고 상식이고 나라고 역사고 간에 도무지 안중에 두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그들은 도청록을 보도했다고 해서 법적인 대응을 공언하고 있다. 도청 테이프에 담긴 내용들은 지난 반세기의 한국지배구조를 설명해줄 가장 극적인 자료로 판단된다. 우리는 이미 1992년 초원복국집 사건을 통해 예고편을 보았다. 이번에 흘러나온 내용도 정치와 재벌, 언론의 뒷거래 치부책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삼성가의 이건희, 이학수에서 홍석현, 이회창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 귀족들의 권력도락 행태가 274개에 앞서 우선 맛보기로 전해진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권력자들과 기득권의 행태를 그보다도 더 생생히 보여줄 자료를 달리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사회가 어떻게 통제되고 조종되었으며, 어떻게 재벌들은 이권을 챙기고, 언론은 국민을 속이고 의식을 마비시켜왔는가 그 음모 공작의 실체가 고스란히 증명될 것이다. 한쪽에서 뒷거래와 공작이 행해지고 그런 음모를 엿듣는 또 다른 공작이 자행되고, 그 정보를 이용한 역공작이 정책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적나라한 실상이다. 정책이라는 것이 국민의 이해관계, 국제정세, 혹은 국가경영 철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모, 암투, 공작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국민의 참담한 심정이란. 불법도청 부각은 또 다른 은폐 당국이 이를 헤아린다면 이번 기회에 해야 할 임무는 자명해진다. 지금부터 이런 엉터리 정치가 다시는 이 땅에서 재현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재벌이 말로는 시장질서, 공정한 경쟁 운운하면서 정치인을 ‘오리발’로 매수하는 비리구조를 뿌리뽑아야 한다. 이 일은 테이프 내용을 충실히 공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그동안 정치개혁과 사회정화에 미적거려 왔던 직무유기에 대한 역사로부터 경고일 것이다.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은 사건 은폐공작에 사력을 다하면서 덮으려 했다. 그러나 허튼 수작을 부리면 부릴수록 진실은 무게를 더해가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당국과 보수세력은 불법도청이라는 문제를 자꾸 부각시켜 사건의 핵심인 테이프 내용을 덮으려 한다. 그렇다면 이는 또 다른 은폐공작이 될 것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테이프 내용을 알게 된 사람이 얼마인데 끝까지 덮을 수 있겠는가. 한번 열리기 시작한 진실의 문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국자들도 뻔히 알면서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우선 피하고 보려는 것일 게다. 솔로몬의 지혜란 따지고 보면 아기를 놓고 다투는 두 여인에게 제시했던, 그가 정한 규칙을 스스로 무시한 데서 찾았다. 법조문을 이용한 알량한 논리를 내세워 불법도청으로 내모는 얄팍한 술수에 연연하는 한, 현명한 해결책은 나오기 어렵고 그만큼 사회적 논란은 장기화 될 것이다. 사생활과 통신비밀 보호를 내세워 테이프에 담긴 비리 공작의 추악한 병리를 호도할 수 없다.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 그나마 혼란을 키우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설픈 위원회 등을 내세워 호도하려 하지 말고 가장 확실한 사실조사 기구를 만들어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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