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5 18:58
수정 : 2005.08.05 22:37
오정소씨 입 다물어 ‘윗선’ 못밝혀
천용택·박지원씨도 조사못해 검찰 손으로
5일 국가정보원의 조사 결과 발표로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도청 조직인 ‘미림’의 활동과 녹음 테이프 유출·회수 경위 등이 일부 진상을 드러냈다. 하지만 누가 도청을 지시했는지, 수집된 자료는 누구에게 보고됐는지 등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 있다.
미림팀 재가동 = 국정원은 1991년 7월 안기부 국내 담당 차장이 미림팀을 과학화해 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정했고, 담당 국장이 공운영(58)씨에게 미림팀을 새로 편성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 1차장이었던 김영수 현 케이비엘(한국농구연맹) 총재는 “기억이 안 난다”며 “당시 ‘득문 정보’라며 술집 등의 종업원들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한 보고는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도청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1차 미림팀은 대선을 앞두고 활동을 멈췄고, 93년 7월 조직 개편에 따라 해체됐다. 이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년 뒤인 94년 2월 대공정보국장이 된 오정소(61)씨가 공씨를 불러 미림팀을 재구성해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공씨는 94년 6월~97년 11월 정·관·재계·언론계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도청을 실시했다.
|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테이프를 입수해 삼성그룹이 정치권에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보도한 이상호 기자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테이프 처리·유출 = 2차 미림팀은 하루에 1~2개 정도의 녹음테이프를 만들었고, 중요 테이프는 장소·시간·대화자가 적힌 꼬리표를 달아 이중 잠금장치가 된 캐비넷에 보관했다. 열쇠는 공씨가 관리했다. 국정원은 “정보 가치가 적은 테이프 등은 일반 캐비넷에 보관하고 6개월(보통 200여개)마다 소각했다”고 말했다. 수천개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소각됐다는 얘기다.
공씨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녹음테이프 274개와 녹취록 5권을 빼돌렸고, 이 가운데 일부가 삼성과의 거래를 위해 재미동포 박인회(58·구속)씨한테 넘겨져 공개됐다. 이에 앞서 활동했던 1차 미림팀의 도청자료는 92년 12월 대선이 끝난 뒤 사무실 캐비넷에 보관하던 40~50개 테이프를 꺼내 불태워 없앴다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남은 의문점들 = 국정원은 94년 오정소 대공정책국장의 지시로 미림팀이 재조직됐다고 말했을 뿐 오씨의 윗선은 밝히지 못했다. 오씨는 “퇴직하면서 신분증을 반납하는 순간 모든 것을 묻어버렸다”며 상부의 누구에게 보고했는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국정원은 전했다. 따라서 2차 미림팀의 도청 내용이 당시 실세였던 김기섭 운영차장을 거쳐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현철씨한테 전달됐다는 의혹을 해명할 책임은 검찰로 넘어왔다. 당시 안기부 1차장을 지냈던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나 황창평(65)씨, 김덕·권영해 안기부장 등이 불법도청에 관여했는지 여부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압수한 테이프와 녹취록 외에 다른 곳에 유출된 도청자료가 또 있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국정원은 공씨가 유출한 녹음테이프가 274개라면서도 공씨한테 회수한 테이프는 261개라고 밝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차이가 나는 테이프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도 풀어야 할 대목이다.
99년 천용택 당시 국정원장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도청자료의 내용을 상당부분 파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들이 이를 활용했을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국정원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
“도청, 2002년 10월까지 계속됐다”
■ 김기삼씨 전화인터뷰
옛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의 존재를 처음 언론에 폭로한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41·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 거주)씨는 4일 밤(현지시각) <한겨레>와 전화통화에서 “2002년 3월까지만 불법 도청을 했다는 국정원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며 “대선 직전인 2003년 10월까지 도청을 계속 했다”고 주장했다.
- 국정원 발표 내용 중 의문이 가는 것은? =김대중 정권 시절의 도청은 2002년 10월 국내 도·감청을 전담하는 과학보안국(8국)을 해체할 때까지 계속됐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2002년 9월) 한화의 대생 인수와 관련한 국정원 도청테이프를 폭로하니까, 신건 당시 원장이 부담을 갖고 8국을 해체한 것이다.
- 그런 주장의 근거는? =당시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자료의 (도청)시기가 대략 2002년 3∼9월이었다. 나는 그때 다른 건으로 양심선언을 하려고 한나라당 당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첫 눈에 그 자료가 (과학보안국에서 나온) ‘메모보고서’(도감청 자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국정원 메모보고서는 컴퓨터 출력이 불가능해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베껴쓴) 필사본이었는데, 한나라당 폭로자료는 워드로 친 것이었다. 누군가 필사본을 빼내와 (안기부) 바깥에서 워드로 쳤구나 생각했다.
-휴대폰 도청이 가능하다는 걸 언제 알았나? =1990년대 중후반에 011 휴대폰이 도청된다는 걸 (안기부 내부에서) 들었다. 또 99년엔 011 외의 다른 휴대폰들도 모두 도청된다는 게 부내의 정설이었다. 그 무렵 예산을 관장하는 기획조정실 친구로부터 “휴대폰 도청을 위해 (외국에서) 값비싼 장비를 들여온다”는 말을 들었다.
-미림보고서 중 기억나는 것은? =이부영씨(전 의원)가 어느 기업인과 만났는데, 돈을 주겠다는 걸 거절하는 도청 내용이 있었다. 그걸 보고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김씨 ‘대선직전 한나라 폭로자료’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 회견 뜻하는듯
김기삼씨가 말한 ‘2002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자료’는, 김영일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2002년 11월28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김 총장은 당시 청와대 관계자와 여야 지도부, 핵심 당직자, 언론인 등에 대한 27쪽 분량의 불법도청 녹취록 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녹취록 자료에는 도청이 2002년 3월8일∼28일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일자가 명기돼 있다. 또, 정치권 인사와 일부 언론사 사주 등의 실명도 적혀있다. 김 총장은 당시 회견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국정원이) 민주당과 한나라당 핵심인사들의 통화 내용을 집중 도청해, 정치공작 자료로 활용했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같은 해 9월과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발언 내용도 거론했다. 정 의원은 당시 국정원 도청자료를 근거로,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과정에 정권 실세가 개입했다”거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이귀남 대검 정보기획관에 전화를 걸어 대북 4억달러 비밀지원 의혹에 대한 계좌추적 자제를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당시 도청시점이나 장소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최익림 기자 choi21@hani.co.kr
|
|
|
|
옛 안기부 ‘미림팀’ 불법도청 조사결과(요약)
1. 미림팀의 구성·해체 경위 및 활동내용
<1차 운영(91.9∼93.7)>
91년 7월 초 국내분야 차장의 결정으로 당시 국내수집 담당국장이 공운영에게 미림팀 편성을 지시, 공운영의 주도하에 총 5명으로 1차 미림팀 편성. 1차 미림팀은 91년9월부터 유명 접객업소를 대상으로 활동을 시도했으나, 경험부족 및 장비성능 불량으로 효율성이 낮아 협조자에 의한 과거 수집방법으로 회귀. 92년 초부터 장비운용 능력이 향상돼 도청장비와 협조를 통한 수집방법을 병행 운영. 활동요원들이 전날의 녹음 테이프나 수집내용을 메모로 작성해 다음날 공운영에게 제출하면, 공운영이 안가(호텔)에서 녹음테이프를 직접 풀어 보고서를 작성해 담당과장에게 보고. 대상은 주요 정치인과 측근들이었음. 92년 9월 담당국장이 “선거전이 갈수록 치열해져 사고가 나면 감당할 수 없다”며 활동 중단을 지시. 92년 12월 활동 중지하고 대선 종료 후 보관 중이던 테이프(40~50개)를 청사 내 소각장에서 소각 처리. 93년7월 미림팀 해체.
<2차 운영(94.6~97.11)>
국내정보 수집 담당국장이 94년 6월 공운영에게 “인사에서 배려할 테니 미림팀을 재구성하라”고 지시. 공운영은 직원 2명을 선발해 2차 미림팀 구성. 정·관·재계 및 언론계 인사 예약사항을 사전 파악해 불법도청 활동 전개. 녹음테이프 해독은 공운영이 안가에서 전담. 초기에는 수집내용을 담당과장을 거쳐 보고했으나 담당국장이 자신에게만 보고하라고 지시. 주요 대상은 97년 12월 대선 전 여당 내부의 동향, YS·DJ 측근인사 및 이회창 등 주요 인사의 동향. ‘홍석현·이학수간 대선자금 전달 관련 대화’ ‘주요기업의 빅딜관련 내용’ 등. 녹음 테이프(1일 1~2개 정도) 중 보고내용이 수록된 중요 테이프는 일시·장소·대화자 이름이 명기된 라벨을 붙여 사무실 내 이중시건장치된 캐비닛에 보관.(공팀장이 캐비닛 열쇠 전담 관리) 녹음상태가 불량하거나 정보가치가 적은 테이프는 사무실 일반캐비닛에 보관하다 6개월(통상 200여 개)마다 소각. 97년11월 대선 전 담당국장이 미림팀 활동 중단과 안가 철수를 지시해 98년4월 정식 해체.
2. 테이프 유출 경위
공운영은 94년 6월∼97년 11월 생산한 테이프(개수 미상)와 녹취록(매수 미상) 중 테이프 274개와 녹취록 5권을 무단 반출. 공운영은 99년 3월 직권면직된 뒤 9월 중순 전직 임아무개(58, 99년3월 직권면직)를 접촉해 불법도청 자료를 이용해 삼성으로부터 사업 지원을 받기로 의논. 같은 달 하순 임씨로부터 재미교포 박인회(58·구속)를 소개받고 삼성과의 접촉 주선을 요청. 박인회가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아무개(59)와의 연결 가능성을 내비치자, 97년 대선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 본부장 간의 대선자금 지원문제 협의내용’이 담긴 테이프 1개와 녹취록 3건(건당 A4 3~4쪽)을 박인회에게 전달. 박인회는 공운영에게 테이프 및 녹취록을 돌려 주기 전 테이프 2개를 복제하고 CD 2개를 제작했으며 녹취록 5부도 복사하여 보관. 박인회는 99년 9월 하순 삼성 구조조정본부에 전화. 다음날 삼성에 찾아가 이 본부장에게 녹취록을 제시하며 5억원을 요구. 이 본부장은 “김아무개(47) 이사와 상의하라”고 말해, 이틀 뒤 김 이사를 만나 금전제공을 조건으로 테이프 제공의사를 밝혔으나 김 이사가 거절. 임씨는 박인회가 당시 박아무개(63) 문화부장관을 잘 안다는 점을 착안해 99년 7월 박인회에게 “국정원에서 퇴출당해 복직 소송을 준비 중인데 장관에게 부탁해 복직을 주선해달라”고 요청. 박인회는 9월 하순 장관 집무실을 찾아가 임씨를 인사시키며 복직 등 인사청탁과 함께 삼성 관련 녹취록 3건(10여쪽)을 전달하며 “형님에게 이 자료가 요긴할 것 같아 가져왔소”라고 하자 “테이프는 있느냐”고 물어, “나중에 드리지요”라고 대답. 그 뒤 테이프를 건네준 사실은 없다고 진술. 박인회는 2000년 1월 김 이사 앞으로 국제소포를 통해 테이프 및 녹취록을 보낸 데 이어, 2월 이 본부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출장 등을 이유로 접촉을 회피함에 따라 협상을 포기함. 2004년 말 국내에 나왔던 박인회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주미대사로 거론되자 “테이프와 문건을 쓸 절호의 시기”라고 판단,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에게 “삼성그룹의 대선자금 지원 관련 문건이 있다”고 접근. 박인회의 상도동 본가에 보관 중이던 테이프를 넘겨줌.
3. 불법도청 테이프 등 회수 및 폐기 경위
99년11월 하순 당시 천용택(68) 원장은 감찰실장에게 임씨가 복직을 하려고 박 장관과 접촉하고 삼성에도 공갈을 치고 있다는 첩보가 있으니 테이프를 신속히 회수하라고 지시. 감찰실장은 전 미림팀원에게 공운영을 설득하도록 지시. 당일 저녁 지시를 받은 직원은 공운영을 만나 “후배들을 봐서라도 제발 테이프를 반납해달라”고 호소. 11월 하순 보안과장은 전 미림팀원과 함께 서초동 한정식당에서 공운영을 만나 “테이프를 반납하라”고 설득했으나, 공운영이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해 당일 테이프 회수에 실패. 12월4일 보안과장은 공운영으로부터 테이프를 반납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공운영의 사무실을 방문해 포장용 황색테이프(5㎝넓이)로 단단하게 밀봉하고 노끈으로 손잡이까지 만들어진 큰 상자 2개(녹음테이프 261개, 녹취록 5권 2300여 쪽)를 전달받음. 공운영은 보안과장에게 “이것이 내가 가지고 나간 자료 전부이고 사본은 없으며, 천 원장 관련내용도 같이 들어 있으니 원장에게 직접 갖다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면서, “테이프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유출하였다”는 내용의 서신(A3용지 10여매)과 천 원장과 관련한 테이프 2개도 함께 제출. 감찰실장은 미림팀 자료 회수 당일 천 원장에게 테이프·녹취록 회수사실을 보고한 후, 보안과장과 함께 밀봉상태 그대로 상자 2개를 원장에게 전달. 99년12월 하순 보안과장은 감찰실장으로부터 “천 원장이 퇴임하면서 지난 번 회수한 테이프를 파기하라고 내려보냈으니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안과 사무실에 잘 관리하라”는 지시를 받고, 녹취록 없이 테이프만 든 상자를 전달받아 밀봉한 후 보안팀 캐비닛에 보관했고, 2~3일이 지난 후 다시 “민감한 내용이니 직접 보관하라”는 지시와 함께 공운영으로부터 회수한 녹취록 5권(2300여 쪽)을 전달받음. 임동원 원장 취임(12월26일) 후인 99년12월 하순 감찰실장은 보안과장에게 녹취록을 가져오게 하고, 보안과 팀장에게 사무실에 보관 중인 테이프 상자를 가져오도록 해 공운영이 작성해 상자에 넣어 둔 목록표대로 테이프 개수(261개)와 녹취록(2300여 쪽)을 대조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뒤 팀장에게 소각을 지시. 팀장은 녹음테이프, 녹취록을 넣은 상자를 청사 내 소각장에서 소각처리.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