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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김기남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는 북쪽 당국·민간 대표단 일행이 6·25 전쟁 전사자 위패와 무명용사 유골이 봉안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현충탑에 참배하기 위해 현충원을 들어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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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당국자들 정문까지만 안내
삼엄경계 속 보수단체 산발시위
설립 50년 만에 북에서 온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은 14일 오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수 우익단체의 돌발행동에 대비해 현충원 주변에 배치된 2600여명의 경찰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한이 현충원 참배라는 ‘금기’를 깨는 역사적 순간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뒤섞인 탓이었다. 오후 2시59분께 예정보다 20여분 늦게 북쪽의 당국 및 민간 대표단이 현충원에 도착하자 고경석 현충원장과 송기호 현충과장이 대표단을 안내했다. 대표단은 곧바로 6·25 전사자 위패와 무명용사 유골이 봉안된 현충탑으로 이동했다. 당국 대표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과 민간 대표단장인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 선두에 섰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 등 남쪽 당국자들은 정문까지만 안내했다. 북쪽 대표단이 이동하는 동안 국군 의장대는 ‘받들어총’ 자세로 예우를 갖췄다. 현충탑 앞에 도열한 대표단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해 묵념’이라는 집전관의 구호에 따라 10초 남짓 고개를 숙여 참배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임시정부 요인 18명을 포함해 전사자와 순직한 군인, 군무원, 종군자, 경찰관 등 5만4456명이 안장돼 있다. 북쪽 자문위원인 림동옥 조평통 부위원장은 현충원을 참배한 배경에 대해 “어려운 결정이었고 언젠가는 넘어야 할 관문”이라며 “6·15 시대에는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성익 조선적십자회중앙회 부위원장도 “6·15 시대에 맞게 구태에서 벗어나 시대정신에 맞춰 화해협력으로 나가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남쪽 대표단 김종수 신부는 “모든 것을 막론하고 현충원 방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인 전기”라며 “이를 어떤 성과로 연결할지가 우리의 과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인성 원불교 교무도 “남북이 구원을 접고 서로 해원하는 통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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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8·15 민족대축전의 북한 대표단이 탄 버스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도착하는 순간, 한 보수단체 회원(오른쪽)이 차량에 돌진하고 있다. 이 시민은 차량 행렬에 유인물 등을 던진 뒤 경찰에 연행됐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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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개척청년단·무한전진·북핵저지시민연대 등 보수우익단체 회원들은 오전부터 3~4명씩 현충원 앞에 태극기와 펼침막 등을 들고 나타나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으나 해프닝에 그쳤다. 자유개척청년단 회원 5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찢으려다 경찰에 제지당했다. 또 오후 3시께 북쪽 대표단이 탄 전세버스 3대가 현충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유언론수호시민포럼 회원 1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버스를 향해 신문지 뭉치를 던지고 반북 구호를 외쳤으나, 경찰이 황급히 이 남자의 입을 막고 연행하기도 했다. 공동취재단,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정부 “참배놓고 하도 말들이 많으니까…”
고민 끝 약식 택한듯 14일 오후 북쪽 당국·민간 대표단 32명의 사상 첫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는 짧고 단순했다. 국립현충원의 공식 참배 절차인 헌화와 분향이 없었다. 남쪽에서 해석이 분분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북쪽은 혁명열사릉 등을 참배할 때 분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화는 반드시 한다. 북쪽의 관례에 비춰서도 이례적인 셈이다. “굳이 해석을 하려고 들지 마라. 그러면 뜻이 작아진다.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닌가?” 북쪽 대표단의 현충원 ‘참배’를 앞두고, 워커힐호텔 앞에서 만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참배 형식에 대한 질문에도, “일반적인 외국 사절의 참배와 다를 것이고 시간도 훨씬 짧을 것이다. 그쪽의 방식이 있다고 하니까…”라며 말을 아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참배 형식’을 놓고 남북의 고민이 적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그는 “만국 공통의 참배 형식인 묵념만 하기로 했다. 하도 말들이 많으니까”라고 말했다. 서로 ‘적’으로 맞서며, 그 와중에 남과 북에서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반세기 전의 전쟁과, 반세기를 넘어선 분단의 어둡고 긴 그림자를 단번에 걷어내기엔 너무도 복잡한 남과 북의 현실 때문에 ‘낮은 수준’의 참배 형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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