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가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원래는 대통령 경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 술자리를 하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다. 10·26 사건으로 여성이 접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가의 운영 목적이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외국에서도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안가를 운영하면서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고 왜 중정에서 직접 관리했나.
경호실은 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적인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함으로써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주변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대통령은 안가를 돌아가면서 이용했나. 10·26이 난 궁정동이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안가 가운데는 아예 가지 않은 곳도 있다.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처럼 여자들을 합숙시키는 곳은 없었다.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들을 활용했다. ‘손이 컸던’ 마담 2명 정도가 주거래처였는데 그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100여명씩 보유하고 있었다.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정 직원이 ‘면접’을 봤고 외모와 경력 등을 따져본 뒤 입이 무거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위주로 선택해 수발을 들게 했다. 연회 원칙 같은 것은 없었나. 술과 음식은 경호실에서 선택하고 준비까지 책임진다. 안가에는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해온다.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 안가에서 대통령은 주로 누구를 만났나. 무척 다양해 특정할 수 없다. 수출을 많이 했거나 해외에서 큰 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하기도 했고,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학자 등을 불러 얘기를 듣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한 그룹 총수와 자주 접촉했는데, 그 총수는 대통령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지원을 부탁해 기업을 눈부시게 키워나갔다. 안가 관리자들의 근무 형태는 어떠했나.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 청소를 비롯한 관리 상태는 항상 최상을 유지해야 했다.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
||||
|
||||
|
||||
70년대 중반까지는 검소한 식생활 박 대통령은 점심을 먹은 뒤 기자실에 돌아와 경기를 함께 보면서 승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유명세에서 앞선 알리에 돈을 걸었지만 박 대통령은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결과는 박 대통령의 ‘독식’이었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그러나 기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었다. 기자들은 박 대통령이 3천원의 ‘상금’을 기자실에 놓고 갈 줄로 예상했으나, 그는 자신의 낡은 지갑을 꺼내 이 돈을 고스란히 집어넣고는 유유히 기자실을 빠져나갔다. 당시 ‘일개’ 국장급에 불과한 공무원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접대 고스톱’을 치거나 수시로 촌지를 건네던 관행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박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나눴다. 1974년 육영수씨가 죽기 전까지는 한달에 한 차례 정도 출입기자들과 식사 모임을 했다. 이는 언론 관리와 정보 수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었다. 기자들은 중정 등 박 대통령의 정보 라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짭짤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정보장교 출신답게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박 대통령은 기자뿐 아니라 대학교수 등 민간인들과 비공식적 모임을 많이 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런 모임에서 얻은 정보를 고위 공직자를 ‘관리’하는 데 자주 활용했다. 지난 1971년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경질한 정래혁 당시 국방부 장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를 동시에 출입하던 한 기자로부터 취재 내용을 자세히 ‘보고’받은 뒤 정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이후락 중정부장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그의 인척이 마포서장으로 있으면서 폭행 사건을 일으켰는데, 피해자의 투서를 본 육 여사의 건의로 박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지시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마포서장을 파면했다”며 “공직자의 비리를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설립이 불가능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증언이다. 황연대(67)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은 “당시 정부 관료들에게 장애인 복지 얘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장애인 복지냐’며 면박을 주던 때였다”며 “청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립회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걸리가 시바스리갈로 바뀌기까지… 장애인 복지사업에 대한 청와대의 지원은 영부인의 각별한 관심에서 나왔다. 육 여사 집안에는 소아마비를 앓던 친조카 3명이 있었다. 황 부회장은 “1965년 육 여사의 초청으로 소아마비 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육 여사가 자신의 조카 얘기를 꺼냈다”며 “그때는 소아마비 자식을 둔 고위층 인사들이 그런 사실을 숨기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육 여사는 황 부회장에게 20만원을 건넸고 황 부회장은 이 돈으로 정립회관 터를 계약할 수 있었다. 육 여사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립회관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황 부회장은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와대는 1967년 걸스카우트회관 건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영화관 입장료의 일부를 떼어내 모아둔 돈을 정립회관 건립에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걸스카우트 총재를 맡고 있던 육 여사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육 여사가 사망한 뒤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도왔다. 197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공사 중단 위기를 맞은 정립회관을 위해 2억원의 ‘하사금’을 내렸는데, 이 돈은 당시 공식적인 대통령 하사금 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975년 정립회관 개관식 행사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씨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 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갔던 것이다. <한겨레21>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 ||||
![]() | <한겨레21>은 장장 60쪽에 이르는 ‘박정희 표지특집’을 선보인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26년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한국 사회에서 활개친다. 한-일 협정 문서 등 ‘박정희 시대’의 비밀도 하나둘 밝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예정이다. 1979년 10월26일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도 개봉된다. 2005년, 우리는 왜 박정희인가. <한겨레21> 기자들이 총동원되어 ‘박정희 시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취재했다. 22면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여자 문제에서 기자에게 박치기를 했던 에피소드까지. 한때 막걸리를 즐겨 마시며 서민의 표상이 됐던 그가 시바스리갈을 마시며 망가지기까지. 당시 김재규쪽 변호사와 청와대 출입기자의 증언을 토대로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를 재구성해본다. 32면 대통령이 남긴 흔적들 박정희는 18년간 전국 각지에 친필 서예작품 1200점을 남겼다. 1주일에 한번씩 휘호를 남긴 셈이다. 이는 그 어느 명필이나 임금을 능가하는 숫자다. 그는 왜 그토록 많은 글씨를 남겼나. 그 솜씨는 어떠했나.“서예가 소전에게 지도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36면 박정희와 한나라당 파워게임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 절연할 것인가. 박정희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는 한나라당 내 대권게임의 전초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2007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박근혜에겐 과연 유리한 것인가. 66면 설날 퀴즈큰잔치 내가 쏘면 퀴즈 개시야, 땅! 박정희 특집호의 하프타임에 찾아온 2004 설 퀴즈큰잔치. 자동차, 노트북, 대형TV…. 그 시절 각하의 하사품같이 푸짐한 퀴즈 경품이 쏟아진다. 너무 어려운 문제도 없다. 그때 그 시절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세 가지 퀴즈, ‘하면 된다’ 정신으로 잘 풀어보세~. ▶[한겨레21] 바로가기 | ![]() |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