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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4일 당 의원연찬회에선 중도파한테서조차 ‘2선 후퇴’를 요구받을 만큼 박근혜 대표의 당 장악력이 흔들리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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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연찬회때 중도파마저 ‘2선후퇴’ 요구…“이회창 전철 답습”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위기’가 심상치 않다.
박 대표는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대통령 탄핵’의 역풍을 헤치고 당의 121석 확보를 이끌어냈을 때만 해도 ‘한나라당의 잔다르크’로 불렸다. 하지만 지난 3∼4일 당 의원연찬회에선 중도파한테서조차 ‘2선 후퇴’를 요구받을 만큼 당 장악력이 흔들리고 있다. 몇 달 사이에 왜 이렇게 처지가 달라졌을까?
◇ 박 대표의 ‘현주소’
박 대표의 당내 위상은 지난해 4월 총선을 거치고 6월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다시 선출될 때까지만 해도 말그대로 확고부동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서치 & 리서치’가 매달 초 실시하는 여론조사의 야당 대표 직무수행 평가 추이를 보면, 지난해 5∼6월 박 대표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60%대로 매우 높았다. 부정적 평가는 10%대에 그쳤다.
그러나 대표 취임 뒤부터 긍정적 평가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 급기야 지난 1월 초 조사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긍정적 평가를 추월했다. 신중식 리서치 & 리서치 연구원은 “지난해 말의 ‘4대 법안’ 정국에서 보여진 박 대표의 태도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박 대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4대 법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가 정점으로 치닫던 지난해 12월23일 실시된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조사에서 그가 ‘잘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32.9%로, ‘잘못한다’는 응답(35.1%)보다 적었다. 연령별로는 20∼40대에서 모두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했고, 50대 이상에서만 ‘잘한다’는 응답이 많았을 뿐이다.
다만 지난 3일의 리서치 & 리서치 조사에서는 박 대표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적 평가(45.1%)가 부정적 평가(36.6%)를 다시 앞질렀다. 이는 1월에 국회가 열리지 않아 여야 대치가 없었고, 박 대표가 민생경제를 강조하며 민생현장 답사를 계속한 데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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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오전 충북 제천에서 이틀째 열린 한나라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박근혜대표가 의원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일부 의원들은 이번 연찬회에서 박대표의 리더십을 문제 삼기도 했다.(제천=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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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원인은
당 안팎에선 박 대표가 흔들리게 된 이유로 우선 “설득의 리더십이 없다”는 점을 꼽는다. 과거의 ‘제왕적 총재’ 시대와 달리 공천과 정치자금 배분, 당직 인선 등에서 대표의 권한이 많이 약화했는데도, 당을 ‘설득’하기 보다는 ‘지시의 리더십’을 관철하려 한다는 것이다.
김형준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정치학)는 10일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상정 거부 등 4대 법안에 대한 완고한 태도와 일방적으로 비쳐진 당직개편 등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적 리더십에 걸맞지 않다”며 “박 대표는 비주류였던 2002년 초 이회창 총재의 제왕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대중적 지지도가 급상승했던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지난 연찬회에서도 오는 5월에 당명을 개정할지 여부를 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가, 의원들의 반발에 부닥쳐 2시간여 만에 거둬들이기도 했다.
박 대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다. 그 스스로는 중도보수를 지향점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주요 고비고비에선 훨씬 보수적 태도를 드러냈다는 얘기다. 권오을 의원은 당 연찬회에서 “여야가 상임위에서 합의했는데도 (과거사법 처리를) 미루고, 시대변화와는 달리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을 삭제하는 것에 반대하고, 남북관계기본법에서 북한의 국호 사용에도 반대한 것이 중도보수, 발전적 보수의 자세에 맞느냐”라고 따졌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조사에서도 자신을 ‘중도’라고 인식하는 사람들 가운데 박 대표가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32.1%)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28.6%)보다 많았다.
“철학과 비전이 부족하다”는 의구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주요 법안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제시와 국민 설득에 주력하기 보다는, 여권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에 기대는 ‘자기방어적’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 분석가는 “박 대표는 이회창 전 총재가 걸었던 ‘개혁 제기→당권 장악→대세론 안주→강경 보수화’의 길을 답습하고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정치부 정재권 기자 jjk@hani.co.kr
박대표쪽 “치마꼬리 잡고 애걸하더니…”에 배신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진영은 당내 비판세력들에 대해 불쾌감을 넘어 배신감까지 드러내고 있다.
박 대표의 최측근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전여옥 대변인은 당 의원연찬회 직후인 지난 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탄핵의 폐허에서 박 대표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걸해놓고 이제 ‘과거사 폭풍’이 몰려오니 대표 혼자 심청이처럼 뛰어내리라고 한다”고 당내 비판세력을 겨냥했다. ‘치마꼬리’나 ‘애걸’과 같은 자극적인 표현이 비판세력에 대한 박 대표 주변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박 대표 쪽은 ‘반 박근혜’ 세력의 공격논리가 모순 투성이이고, 그래서 어떤 정략적 의도를 가진 ‘박근혜 흔들기’라고 의심하고 있다. 우선 ‘과거사 족쇄론’에 대해선, “국민 여론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인만큼,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박 대표 쪽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당내 한쪽에서 오히려 이를 근거로 대표직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외부의 힘을 빌어 이득을 얻으려는 ‘이적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대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항변한다. 박 대표 쪽 관계자는 10일 “박 대표가 그 나름대로 민주적 리더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비판 세력들이 이런 순수한 의도를 악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박 대표도 지난 4일 연찬회 마무리 발언에서 “이제 옛날 1인 지배체제처럼 한 사람이 결정해 끌고가는 시대가 아니다”며 “내 계파를 만들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문제는 당내의 비판이 차기 대통령후보 경선 구도와 맞물려있어, 박 대표 쪽으로서도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박 대표 흔들기’는 사실 드러난 피상적 이유보다 당내 권력투쟁적 측면이 강하다”며 “그래서 박 대표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과제”라고 말했다.
박 대표 쪽은 이런 상황인식에 따라 당내 갈등과 비판에는 당분간 거리를 두면서, 당 쇄신과 정책행보 등을 통해 자신의 강점인 대중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주력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정치부 정광섭 기자 iguass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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