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심으로 이상의 잘못과 이단을 포기하고 저주하며 싫어함을 이에 맹세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이 같은 의심을 받을 일들은 입으로나 책으로나 말하며 주장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이에 맹세합니다.…" 』(1633, 이단재판소에서 갈릴레이의 선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에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피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수학과 물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갈릴레이는 사원에 걸려 있는 등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고, 피사의 탑에서 낙하실험을 하는 등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 진보성향 때문에 대학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이 천재의 삶과 관련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이야기에 따르면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는 자신의 과학적 입장을 포기하고 풀려나왔다. 그 때 종교재판소의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 신화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종교재판소가 교회의 신념과 다른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박해하여 그의 과학적 입장을 포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갈릴레이는 할 수 없이 주장을 번복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과학적 진리에 대한 가톨릭의 무지와 편협함, 그리고 종교적 권위가 한 과학자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교회의 독단을 관철시켰다는 관점이 지배적으로 들어 있다. 17세기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해석은 나름대로 역사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100년 전 코페르니쿠스는 그 유명한 <첸체에 관하여>에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과 관련된 학문적 결론을 발표하여 1천년 이상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프톨레마이오스식 천동설을 바꾸어 놓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었다. 당시 교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 책의 견본을 안고 숨졌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은 곧바로 금서목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이탈리아의 사제이자 학자인 지오르다노 부르노가 지동설을 지지했다. 당시 루터나 멜랑흐톤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에게마져 지탄을 받았던 지동설을 지지하던 부르노는 결국 사제직을 박탈당했고, 끝내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마에서 화형을 당하게 된다.
갈릴레이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레르니쿠스의 두 대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1632)는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관측한 태양계의 상황을 비교적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물론 교회의 법에 저촉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구중심설을 포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교회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결국 이듬해에 종교재판소에 소환당하고 만다.
코페르니쿠스와 부르노의 경험은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오늘날 회자되는 것처럼 종교재판소의 분위기는 살벌했고(이단을 처형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갈릴레이는 종교적인 편견과 억압 앞에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지켜내기 어려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갈릴레이는 결국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포기하고 종교재판소의 권면을 받아들임으로써 화형의 위기를 모면한 채 풀려나오게 된다. 그 후로는 수년 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있다가 78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몇몇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역사적 추론은 다소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실제로 갈릴레이가 한 말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혹자는 그 말이 100여년 후 프랑스의 신부 이라이야가 <문학논쟁>에 쓴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신빙성을 인정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추론에 따르면 갈릴레이의 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자신의 책<천문대화>로 인해 로마 교황청에서는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소에 소환되었다. 그는 재판소에서 자신의 과학적 입장을 심판관들 앞에서 증명해야만 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발견한 과학적 결과들-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들-을 토대로 지구중심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확증해 줄 수는 없는 과학적 결과들이기 때문에 인식의 페러다임이 바뀌지 않은 재판관들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재판관들의 권면대로 완전히 증명할 수 없었던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로 선언(위의 선언문)하고 재판소를 나설 수 있었다. 그 재판소의 문을 나설 때, 갈릴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중얼거릴 수 있었다. “이상하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하나의 진리체계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그 진리를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갈릴레이의 연구 업적은 이후 뉴튼에 이르러서 결실을 보게 된다. 그 때까지 갈릴레이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고뇌는 오늘 우리시대에도 반복되곤 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 사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의 전환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있기에 결국 새로운 인식 체계는 도래하고 만다.
갈릴레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지적 고뇌와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이 사회의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고 더 분명한 진리체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고뇌에 찬 모색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잘못된 통념들이 설득당하는 날을 맞이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신화들이 벗겨질 그날까지 우리의 모색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구는 계속 돌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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