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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3 18:18 수정 : 2007.06.13 18:18

대형 재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고통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 적극적인 치유를 하지 않으면 정신적 장애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진은 2003년 2월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출구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로 사망한 주검을 들고 나오고 있다. 대구/강창광 기자

대구지하철 참사 생존자들 후유증 심각


2003년 2월18일. 192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에서 148명이 생존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한 여학생은 “(학교 갔다) 지하철을 타고 오라”는 말에 아빠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극장에서 다른 관객과 함께 컴컴한 입구로 나오던 한 생존자는 갑자기 기억이 없어지면서 발작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들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상담원에게 말했다.

뇌 일부 훼손으로 감정조절 어려움
아버지 뺨 때리고 갑자기 발작하고
아기 잊어버리고 집중력 떨어지기도

대구지하철 사건처럼 큰 충격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은 고통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 적극적인 치유를 하지 않으면 영원한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는 얘기다.

13일 재난·재해 피해자의 심리적 상흔(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서울내러티브연구소(소장 최남희 서울여자간호대학 간호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대구지하철 생존자들은 충격으로 뇌의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조사됐을 뿐더러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행동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내러티브연구소가 대구지하철 생존자 20여명과 일반인 20여명의 뇌 영상을 합성해 비교한 사진. 왼쪽 일반인들의 뇌에서는 회로 모양의 백질이 뚜렷이 보이는 데 비해 생존자들의 뇌에서는 이 부분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서울내러티브연구소 제공
대구지하철 생존자들과 일반인 각 20여명의 뇌 영상을 비교해본 실험에서는, 생존자들 뇌의 전대상회(ACC)에서 편도체에 이르는 부분의 백질이 상당부분 감소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백질은 일종의 회로로 감정이나 집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다. 이 부위가 훼손될 경우 깜박깜박 잊는다든지 울컥 화를 내는 일이 발생한다. 마치 다친 다리를 오래 동안 쓰지 않으면 퇴화하는 것처럼, 충격을 받은 뇌가 스스로 회로의 스위치를 내린 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회로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실제로 생존자들 가운데는 집중력이 떨어져 직업이나 학과를 바꾼다든지 애기 엄마가 가게에 맡긴 아기를 잊고 집에 돌아오는 경험들이 보고되고 있다.

연구팀은 생존자들과의 면담에서 이들이 화재 발생 뒤 지하철 객차 밖에서 사투를 벌이기 전 상황에 대해서는 “그러다가 번뜩…큰일일 수도…” 등 논리적 선후 관계를 비교적 정확히 서술하는 반면 충격에 휩싸인 뒤에는 연속성이 없이 “숨이 턱 막히는데…발 밑에 뭔가 밟히는데…생각할 수 없었어…” 등의 단순한 열거만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구지하철 참사 생존자들 후유증 심각
지난 8~9일 한국외대에서 열린 한국인지과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한국인지과학학생회 활동보고로 연구결과를 발표한 유정(연세대 인지과학협동과정 박사과정)씨는 “생존자들의 정신적 장애들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기억 활동을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상관없이 이미 몸에 밴 어떤 감각적 상흔에 의해 비의지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런 경우에는 치유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대구지하철 생존자 가운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20~30대 13명과 큰 사고를 겪은 적이 없는 같은 또래 17명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했다. 사과와 배를 왼쪽과 오른쪽에 놓아 두고 사과만 보라는 과제를 준 뒤 과일의 위치를 바꿔가며 과제를 푸는 시간과 반응 등을 측정하는 실험이다. 연구 결과, 트라우마를 겪은 13명은 현재 기억 활동 능력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사과와 배의 위치를 맞바꿨을 때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또 일반인들은 뒤바뀐 위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데 비해 생존자들은 정상 위치 때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유씨는 “이는 충격적 사건과 당시의 공포 등 감각적 내용이 통합적으로 기억돼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자극만이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며 “이 때문에 길거리에서 나는 사소한 소리를 의식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자극을 받는 일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남희 소장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들에게 당시의 기억을 회피하도록 하면서 세월이 흐르면 치유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법이 아니다”라며 “가족 등 주변에서 그들이 당시 겪은 경험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후속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유도해 자신의 경험 전체 속에서 사건을 해석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릴 때 입은 화상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자라면서 화상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연구팀의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수행됐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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