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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닐스 보어가 교수와 싸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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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20세기 물리학에 기여한 보어의 업적은 마땅히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꼽아야 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리처드 로즈는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의 업적에 대해 이같이 썼다. 현대물리에 아인슈타인이 차지하는 자리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확고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꼽힌 보어는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보어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크레스드얀 보어는 유명한 코펜하겐대 생리학교수였고, 어머니 엘런 아들러 보어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보어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그는 대학생 때 표면장력을 결정하는 방법인 ‘물 분사의 진동’에 대해 실험하고 이론적으로 분석해 덴마크 ‘왕립 과학문학 아카데미’의 금메달을 받으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전자를 발견한 톰슨을 동경했던 보어는 대학 졸업 후 그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영국 캠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그러나 톰슨은 보어의 연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크게 실망한 보어는 할 수없이 맨체스터로 옮겨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톰슨과 헤어지고 러더퍼드와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바탕으로 보어는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안했고 이 업적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했으니 말이다. 보어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안해서 당시 빛의 복사에 관한 이론이었던 양자론을 원자론에 도입한 것이다. 당시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실험을 통해 나온 여러 현상들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보어는 막스 플랑크, 아인슈타인 같은 이론물리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양자론을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에 결합시켜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양자(量子)란 어떤 물리량이 연속값을 갖지 않고 단위량의 정수배로 나타날 때 그 단위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어는 “모든 원자는 안정 상태 또는 불안정 상태로 존재할 수 있고, 각 상태의 에너지는 양자로 나타난다”고 가정했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이렇다. 첫째 원자핵 주위에는 전자가 돌고 있다. 둘째 전자들이 도는 궤도는 각각 다른 에너지를 갖는다. 셋째 전자가 다른 궤도로 이동하면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데 이 값은 양자로 나타난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당시 받아들이기 힘든 대담한 발상이었지만 분광학 실험들을 통해 사실임이 증명됐다. 이 모형은 양자론을 활짝 꽃 피우는 기폭제가 됐다. 즉 고전역학이 현대 양자역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보어의 원자 모형이 그 중간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엄청난 업적”이라는 말로 보어의 원자 모형이 갖는 의의를 설명했다. 물론 보어의 원자 모형에도 한계는 있었다. 전자의 개수가 1개인 수소 원자의 에너지는 보어의 원자 모형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전자의 개수가 2개 이상일 때는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여러 차례 수정해 오늘날 전자구름 모형으로 발전시켰다. 보어는 원자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어는 미국이 주도하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프로젝트’ 소식을 미리 알았다. 그는 막강한 독일군을 이기기 위해 원자폭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이 무기가 앞으로 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했다. 보어는 차라리 핵개발의 내용을 소련(현 러시아)에도 알려주고 공동으로 기술을 관리해서 원자폭탄의 무차별 확산을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보어의 이 생각은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의 오해로 무산되고, 전쟁 후 세계는 핵개발 경쟁에 휩싸이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62년, 닐스 보어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차 대전 동안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던 아들 아게 보어(Aage Niels Bohr, 1922~)는 아버지가 이끌던 연구소를 계승했고, 원자핵의 구조 연구에 공헌해 1975년 아버지에 이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닐스 보어가 코펜하겐대 물리학과에 다니던 젊은 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기압계를 사용해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법을 논하라’는 문제에 대해 교수와 보어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보어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압계에 줄을 매달아 아래로 늘어뜨린 뒤 줄의 길이를 재면 된다”고 답을 써 냈다. 교수의 기압이 높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높이를 계산하라는 의도로 문제를 냈지만 보어는 판에 박힌 답을 하기 싫었던 것이다. 중재를 맡은 다른 교수가 “6분을 줄테니 물리학 지식을 이용해 답을 써내라”고 하자 보어는 즉석에서 “기압계를 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린 뒤 낙하 시간을 잰다. 그럼 건물의 높이는 {½x중력가속도x낙하시간2}이다”고 답했다. 문제를 출제한 교수는 이 답안에는 높은 점수를 줬다. 교수가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보어는 “옥상에서 바닥까지 닿는 긴 줄에 기압계를 매달아 시계추처럼 움직이게 하고 그 주기를 측정하면 줄의 길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등 5가지 다른 독창적인 방법을 제시해 교수를 놀라게 했다. 보어 자신이 꼽은 가장 좋은 답은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다고 한다. 출제자가 의도한대로 답을 내놓는 사람은 성적을 좋게 받을 수 있지만 전대 과학자들이 이뤄놓은 이론을 재확인하는 정도의 업적을 남길 뿐이다. 똑같은 답을 거부했기에 보어는 러더퍼드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원자에 대한 생각의 틀을 뒤엎는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과학적인 답’이라는 명목 아래 획일화된 답을 요구하는 환경에서는 닐스 보어와 같은 위대한 과학자를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글 : 김정훈 과학칼럼니스트)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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