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17 19:26
수정 : 2007.10.1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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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스탠포드대학 아태연구센터 초청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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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된 경제 탓 과학기술 현장 지향적
에너지·식량 해결과 생산성 향상 주력
우리는 종종 북한이 과학기술 중시 정치를 펴고 있고 첨단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므로 남북 간에 협력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일견 옳은 말이다. 북한은 오랫동안 중장기 경제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1998년부터 별도의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립·시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2022년까지의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계획을 통해 침체한 경제의 회복과 미래 신산업 창출을 병행하고 있다.
북한이 199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추진 중인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2003-2007)’의 주력 방향은 인민경제의 기술적 개조, 인민생활 개선, 첨단기술 개발, 기초과학 육성의 네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경제지원, 삶의 질 향상, 미래 신산업 창출, 기초과학 육성 등으로 구성된 우리와 상당히 비슷한 면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 영역별로 대등하게 남북한 과학기술 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그 체제와 세부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말하는 과학기술은 우리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총요소 생산’과 비슷한 개념을 지닌다. 노동과 자본의 투입을 제외한 모든 경제성장 기여 요소를 과학기술이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국가과학기술계획은 우리보다 월등히 더 현장 지향적이고, 그만큼 침체한 국가경제 현실에 강하게 얽매어 있다. 우리의 구분으로 보면 기업이 수행하는 산업기술에 가깝다.
남과 북의 국가경제가 직면한 상황과 수준에 큰 차이가 있는 만큼, 북한 국가과학기술계획의 세부 과제들도 우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북한의 경우, 경제 분야에서는 에너지와 자원문제 해결에, 인민생활 분야에서는 먹는 문제 해결에,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과학화·자동화를 통한 획기적 생산성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따로 ‘연료, 동력 문제 해결을 위한 3개년 계획(2003-2005)’을 세워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문제’라는 글귀가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들 분야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고, 북한 과학기술계가 이의 해결에 전력투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의 과학기술계획에서 수력발전소 수차 제작, 화력발전소 연소효율 개선, 송전 손실 감소, 전력 다소비 공장 개조, 태양력과 풍력, 조수력 등 추가 전력원 개발, 채굴 과학화와 설비 개량, 석탄 가스화, 종자 개량, 이모작, 토지 정리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북한을 둘러싼 최근 정세와 남북한 경제협력에서도 항상 중심축이 돼 왔다. 영변 원자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대북한 송전, 개성공단 전력지원, 광물자원 개발, 비료·식량 지원 등이 그것이다. 어느 국가에서나 에너지와 식량은 경제와 국민생활의 기본적인 선결과제인 만큼, 이런 분야에서 문제해결 없이는 여타 분야로 중심을 전환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북한 과학기술계가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런 문제의 해결에 집중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현실과 절박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식대로 대북한 협력을 제기하면 북한의 호응을 받아내기 어렵다. 어찌 보면 그동안 남북한 과학기술 협력이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도, 이런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를 극복할 수 있다면, 남북한 과학기술 협력이 북한 경제의 현안을 해결하고 경제공동체 실현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북핵 문제의 해결과 국제사회의 신뢰 획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춘근/ 스탠포드대학 아태연구센터 초청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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