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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본질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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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탄생 200돌’ 기고
찰스 다윈(1809~1882)은 매우 성공적인 개업의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과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 웨지우드 가문의 어머니 수재너 사이에서 1809년 2월12일 태어났다. 다윈이 마을 학교에 입학하던 1817년 여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슬픔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듯하다. 나이 차가 나는 세 명의 누나와 그 아래로 다섯 살 위의 총명한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든버러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도 그의 곁에는 함께 공부하고 사냥을 다닐 형이나 사촌형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나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있었다. 영국 군함 비글호로 남아메리카 연안을 누빈 경험과 그간의 연구 결과들을 출판하며 학계에 발을 내디딘 다윈은 외가 쪽 사촌 에마와 결혼해 런던에서 멀지 않은 시골인 다운에 정착했다. 그 뒤 다윈은 공식 행사를 멀리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끼던 열 살배기 딸이 죽었을 때도, 가장 가까웠던 동료인 라이엘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때도 그는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를 느끼면 심장의 박동이 불규칙해지는 것을 느꼈고 구토와 현기증이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고, 몇 군데 목욕치료 시설을 찾아다니며 장시간 찬물로 목욕하며 피부를 마사지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치료에 집착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계나 주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학자들은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편집해 출판하고 있는데, 그가 쓴 1만5천통 정도의 편지가 수집됐다. 경건한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다윈은 또한 마을의 교구목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공제조합을 설립했다. 그리고 매년 일정액을 기부하면서 죽는 해까지 들고 나는 소소한 금액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조합 회계를 맡았다. 다윈이 쉰 살 되던 해에 출판된 <종의 기원>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을 설파해 종교적 인간관을 깨뜨림으로써 당시 영국 사회에 충격을 준 혁명적 저술이라는 점이 강조돼 왔다. 하지만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이미 생물 종이 자연의 형성물로서 변해 왔음을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자유사상가였던 이래즈머스 다윈은 종교적 도그마를 비교적 자유롭게 해석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던 처가 웨지우드 가문 사람들의 종교관을 “추락하는 기독교를 떠받치는 솜털 이불”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 <종의 기원>에 그려진 진화론으로 인해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연선택의 어두운 자연관으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19세기 영국인들이 다윈 진화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데는 영국교회 및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사회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는 중산층 및 전문인 집단 사이의 갈등이 그림자처럼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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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윤/한양대 강사·전 한국과학사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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