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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대신 암 덩어리를 분양하는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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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돈보다 사람의 몸을 좋아하는 은행이 있다. 건강한 사람, 질병에 걸린 사람, 남자, 여자 등 사람의 조건을 가리지 않는다. 혹시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같은 인물이 은행장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본점은 물론 지점까지 갖춘 은행이지만 돈을 빌리거나 예금할 수는 없다. 대신 사람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이를 분양한다. 은행에 따라 취급 대상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태워서 없앨 암 조직만 주로 취급하는 은행도 있다. 은행 지하에는 돈이나 귀금속을 보관하는 금고 대신 은색 탱크 수십 개가 놓여 있다. 액체질소를 이용해 영하 195도를 유지하는 이 탱크는 각종 인체조직을 보관하는 인체금고다. 이 같이 인체조직을 관리하는 기관을 미국에서는 ‘바이오뱅크’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인체유래검체은행’ ‘인체유래자원은행’ ‘조직은행’ ‘종양은행’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는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12개의 병원과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는 5개의 병원이 매년 수억 원의 비용을 들여 인체유래자원(검체)을 관리하고 있다. 인체자원 중앙은행으로 지정된 서울 은평구 질병관리본부는 인간의 혈액을 백혈구세포, 혈장, 혈청, 혈구, 유전자샘플 등으로 분리해 보관하고 있다. 액체질소탱크 69대와 영하 70도로 유지되는 초저온 냉동고 79대를 보유하고 있어 혈액자원 보관시설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그런데 왜 태워서 사라질 인체조직을 보관하는데 수억 원의 비용을 들여가며 관리하는 것일까. 지난달 말부터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인플루엔자A(H1N1)를 예로 들어보자. 신종플루 백신을 만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바이러스다. 바이러스가 있어야 바이러스를 분석하고 연구해 백신 개발이 가능하다. 신종플루가 새롭게 변할 경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변종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야 한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특정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법이나 신약 개발을 하려면 해당 질병 정보가 필요하다. 즉 암 유전자를 찾아내려면 암에 걸린 인체조직이 있어야 이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국립암센터는 10년 동안 모은 1만여 개의 인체조직 샘플을 지난해부터 전국에 있는 의사와 과학자에게 분양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조직을 건네받아 단백질, 유전자 등을 추출해 연구 자료로 활용한다. 인체 질병이나 유전자 연구는 인체조직을 몇 개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인체 자원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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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암센터 지하에 위치한 ‘종양은행’에는 액체질소 탱크 20기가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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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관에 넣어진 인체조직은 초저온 냉동고로 이동돼 보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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