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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즐겨 먹는 캐번디시 바나나. 흔히 ‘바나나 나무’라 부르지만 사실 지구에서 가장 큰 풀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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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온] 위기에 처한 열대 작물 2인방
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 사람은 바나나에 관해 각별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바나나는 개당 1000원에서 1500원 정도였다. 당시 도시 근로자의 월 평균 소득이 40만원 안팎이었음을 고려하면 굉장히 비싼 과일이었다. 바나나가 국내에 본격 수입된 것은 수입제한 품목에서 풀린 1991년이었다. 이후 수입량이 꾸준히 늘어 2012년엔 36만7000톤의 바나나가 국내에 수입됐다고 한다. 껍질만 벗기면 간편히 먹을 수 있고 과육도 연해 인기 만점인 바나나를 온 국민이 즐기는 시대인 것이다.
국내에서야 바나나가 간식거리이지만 많은 열대 나라에서 바나나는 주요 식량이다. 실제로 수출을 위해 재배하는 바나나는 전체 생산량의 1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에서 소비된다고 한다. 열대 개발도상국에 사는 4억명 넘는 사람들이 날마다 섭취하는 칼로리의 3분의 1을 바나나에서 충당한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최근 바나나가 장차 사라질 수 있다는 과학계의 경고가 터져나와 인류의 식량 안보와 세계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씨 없는 무성생식 먹기 좋지만
유전 다양성 약해 병균에 취약
잎 말라죽는 바나나마름병균
동남아, 중동 거쳐 전세계 확산중
커피엔 녹병 곰팡이균 번지는 중
저항성 갖춘 품종 개발 나섰지만
유전자조작 기법 논란 부를 가능성
‘대량 상업재배가 주범’ 목소리도
열대과일의 대명사, 바나나의 위기
지난 4월, 미국 뉴스채널 <시엔비시>(CNBC)는 바나나 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말엔 바나나를 감염시키는 곰팡이병이 세계에 확산하고 있다며 해결책을 촉구하는 보도가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실렸다. 같은 곰팡이병이 바나나 산업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간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우려의 목소리는 높았다. 1960년대 이전에 과실도 크고 당도도 높은 ‘그로스 미셸’ 품종이 바나나의 대세였지만 곰팡이병으로 인해 시장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캐번디시 품종이 대신해 수출용 바나나의 80%를 차지한다.
문제의 곰팡이병은 ‘바나나마름병균’(푸사륨 옥시스포룸)이라는 토양성 곰팡이의 일종이 일으킨다. 평소 흙속에 있던 곰팡이 균사가 뿌리를 통해 침투하면 물관을 거쳐 식물 전체로 퍼지며 번식한다. 이 과정에서 균사가 바나나의 관다발을 막아 수분 공급이 차단된다. 이 때문에 바나나는 잎이 노랗게 변하며 말라죽는다.
사실, 바나나마름병균은 상업용 바나나 재배가 본격 시작되고 얼마 뒤인 1903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바나나마름병은 원래 파나마에서 발견돼 ‘파나마병’으로 불렸다. 당시 문제를 일으킨 바나나마름병의 균주는 ‘레이스 원’(R1)이었다. 이후 이 균주는 파나마의 이웃 나라들로 빠르게 번져, 1960년에는 급기야 그로스 미셸 품종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행히 영국 캐번디시 공작의 정원사였던 조지프 팩스턴이 발견한 캐번디시 품종이 바나나마름병균 레이스 원에 내성도 갖추고 상품성도 지녀 그로스 미셸 바나나를 대체할 구세주로 등장했다. 1970년대 말 세계 바나나 수요가 늘어나며 동남아 국가에서 캐번디시 바나나의 상업적 대량재배가 신흥산업으로 장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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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바나나에는 씨가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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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캐번디시 바나나 재배가 시작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말레이시아의 일부 농장에서 바나나가 말라죽기 시작했다. 증상이 파나마병과 비슷했지만 식물에 영향을 끼치는 속도와 전파력은 훨씬 컸다. 여러 연구를 거쳐 밝혀진, 바나나마름병균의 새로운 균주는 ‘열대 레이스 포’(TR4)로 명명되었다.
최근 문제가 된 곰팡이병은 이 균주 때문이다. 바나나마름병균에 내성이 있다고 알려진 캐번디시 바나나조차 이 새로운 균주 앞에선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이 균주는 주요 바나나 생산국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검출되었고 중동의 요르단과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도 추가로 검출돼 전세계로 번지는 추세이다. 이 균주가 중남미에 도착한다면 충격의 여파는 만만찮을 전망이다.
이처럼 바나나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새로운 바나나마름병균에 대한 대책을 찾느라 여러 학자들이 고심하고 있다. 다행히 야생 바나나 일종의 유전체(게놈)가 2012년 발표되었는데 그 유전정보에서 새로운 균주에 내성을 띠는 유전자를 찾아내어 캐번디시 품종에 유전자 조작으로 집어넣으려는 연구가 한창 진행이다. 유전자 조작 바나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곰팡이병 발생 지역에서 행한 야외 실험에서 희망적인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현실에서 효과를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되는 바나나를 소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이다.
커피 산업도 안전하지 않다
2013년에는 열대농업의 또다른 축인 커피 작물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커피 잎을 감염시키는 곰팡이인 ‘헤밀레이아 바스타트릭스’가 주로 일으키는 ‘커피녹병’ 때문이다. 이 곰팡이에 감염되면 처음에 잎의 윗면에 황백색 반점이 생기고 감염이 진행되면 반점이 점차 커지며 잎 아랫면에 오렌지색의 곰팡이가 자란다. 감염된 잎은 커피나무에서 떨어지는데, 감염된 잎이 많이 떨어지면 자연히 커피 생산량은 줄어든다.
바나나와 마찬가지로 커피녹병도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커피의 상업적 재배와 더불어 이미 알려진 식물병의 하나였다. 영국은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이지만 원래는 커피를 주로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무렵 커피의 주요 수입지인 스리랑카에서 커피녹병으로 인해 커피 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지자 커피 대신 차를 주로 마시던 것이 차 문화로 발달한 것이다.
최근 커피녹병의 진원지인 중남미에서도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이 병이 보고됐지만 지난해엔 그 피해의 규모가 우려 수준으로 커졌다. 커피녹병이 갑자기 큰 문제가 된 것은 기후변화와 커피의 상업적 대량재배가 원인인 것으로 관련 연구자인 미국 퍼듀대학의 캐시 에이미 박사는 추정했다. 커피녹병으로 인해 중남미 일대의 커피 생산량은 2012년 15%가량 줄어들어 40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또한 중남미 국가에 끼친 손해는 이미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바나나마름병과 달리 커피녹병은 곰팡이 살균제를 사용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약제 살포에 따른 경제적 비용이 추가되고 커피 안전성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영세 농장주들은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미국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에서 500만달러(약 51억원)를 들여 텍사스 에이앤엠(A&M)대학 커피연구센터와 함께 커피녹병균에 저항성을 갖춘 유전자 조작 커피 연구에 나설 계획이다.
상업적 대량재배가 부른 재앙
바나나와 커피 작물은 과연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여러 대책들이 마련되고 있어서 뉴스가 전하는 대로 당장 큰일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상업적 대량재배는 이런 문제가 언제고 재현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상업적 대량재배의 대상인 캐번디시 바나나는 야생 바나나와 달리 과실에 씨앗이 없다. 그래서 줄기 모양의 영양 조직을 잘라 옮겨 심는 무성생식 방식으로 재배한다. 이렇게 자라는 바나나는 유전적 다양성이 단순해지고, 특히 단일 식물을 고밀도로 심는 대량재배의 특성상 전염병에 취약하다.
커피녹병의 피해도 상업적 대량재배가 초래한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커피는 원래 음지 식물이었지만 상업적 대량재배 환경에서는 양지에서 고밀도로 재배된다. 양지에서 자라는 커피나무에선 직사광선에 따른 기온 상승으로 곰팡이가 잘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염병 문제에 더해 대규모 상업재배는 생물의 서식지 파괴와 농약의 대량살포, 노동력 착취 등 여러 문제를 낳는다. 지구촌 사람들이 즐겨찾는 바나나와 커피에 대한 우려는 이런 농업 형태에 대해 근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손재천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연구원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에 실린 글을 필자가 줄이고 다듬어 다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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