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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의 1877년 작 <낮잠>. WikiArt.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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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온] 베일 벗는 ‘뇌의 기본 회로’
‘뇌는 일할 때 활성화’ 오랜 통념 깨고
쉴 때 오히려 바빠지는 뇌 영역 발견
과제 수행 준비하는 대기 모드 일종
성찰, 역지사지, 창의성 등에도 관여
휴식 없으면 ‘기본 회로’ 활동도 약화
더욱 질 높은 정신 활동 바란다면
아무리 바빠도 휴식시간은 꼭 필요
추석 연휴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예년과 달리 추석이 일러 그럴까? 올해 추석은 가을의 시작보다는 휴가철을 마무리하는 여름의 끝처럼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일터를 떠나 가족 친지와 흥겹게, 또는 홀로 조용히 쉼을 즐겼으리라.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초록 내음이 가득한 산에서, 낯선 외국의 거리에서, 익숙한 고향 집에서,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일을 내려놓고서 말이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휴가 때처럼 일손 놓고서 아무 생각 없이 쉴 때에도 우리 몸에는 여전히 쉬지 않는 기관이 있다. 바로 뇌이다. 물론 생명 유지에 필수인 호흡이나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뇌 영역은 당연히 조금도 쉴 수 없지만, 이곳을 빼고도 뇌에는 여전히 분주한 활동에 필요한 많은 혈액이 공급된다. 가수 ‘리쌍’의 노래 제목을 빌리자면 뇌는 우리가 넋 놓고 쉬는 중에도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뇌가 휴식 중에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뇌는 평소엔 조용히 쉬다가 무슨 일을 할 때에만 바쁘게 가동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오래전인 1929년에 뇌파검사(EEG)를 개발한 독일 신경과 의사 한스 버거가 ‘뇌는 늘 일정한 활동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의견은 이내 묻혀 버렸다. 이후 과학의 발전으로 뇌의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 뇌는 일할 때만 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95년 미국 신경공학자 버랫 비스월이 다시 통념에 의문을 던졌다. 당시 그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의 해상도를 높이고자 불필요한 영상 신호(잡음)를 제거하는 기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뇌가 쉴 때 영상 신호에 섞여 나오는 잡음이 호흡이나 심장 박동처럼 뇌 바깥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잡음의 주된 원천은 뇌 안에서 흘러나오는 느린 주파의 파동이었다.
뜻밖의 발견이 이어졌다. 여러 연구 끝에 뇌가 쉬는 동안에도 오른손을 조정하는 뇌 영역과 왼손을 조정하는 뇌 영역에서 나오는 잡음 신호가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이런 발견이 뇌가 쉴 때에도 두 영역이 긴밀히 연결돼 활동을 지속함을 보여준다고 해석했지만 그의 주장은 과학계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그 발견이 측정 오류나 기술적인 다른 문제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뇌의 기본 설정,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2001년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마커스 레이클은 ‘쉬고 있지만 쉬지 않는 뇌’를 설명하는 새 개념을 제안했다. 1990년대 그는 양전자단층촬영(PET)을 이용해 뇌 연구를 하던 중에 이상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일부의 뇌 영역이 쉴 때엔 부지런히 활동하다가, 오히려 휴식이 끝나면 활동이 줄어드는 현상이었다. 그는 1998년에 이 결과를 학계에 보고하려 했으나 통념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은 논문은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클은 굴하지 않았다. 결국 휴식 상태에서 활성화하는 여러 뇌 영역이 정작 어떤 과제를 수행할 때엔 비활성화하며 이는 과제 수행과는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이런 현상을 뇌가 무언가 일할 때엔 활동이 줄다가 쉴 때엔 다시 활동이 늘어나도록 내정된 기본상태라고 풀이해, ‘기본상태’(디폴트 모드)의 신경회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랜 통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2년 뒤 다른 연구팀에 의해 기본상태 회로를 이루는 뇌 영역들이 비록 서로 인접해 있지는 않지만 기능으론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밝혀졌다. 연구팀은 피실험자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도록 하는 간단한 방법을 이용했다. 기능적 연결성이 확인되고 쉽고 편리한 실험기법이 알려지면서 뇌의 기본상태 회로 연구는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기본상태 회로라는 개념을 계속 의심했다. 쉬는 뇌에서 관찰되는 느린 주파의 파동이 뇌 바깥에서 오는 잡음일 가능성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3년 독일 출신의 인지신경학자 안드레아스 클라인슈미트가 뇌파(EEG)를 이용해 기본상태 회로가 실제 뇌세포의 활동임을 입증하면서 논쟁의 추는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이제 기본상태 회로는 신경과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있다.
휴식 중의 뇌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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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기본상태 회로 영역에서는, 집중력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때 활성도가 떨어지며(위) 휴식을 취할 때 오히려 활성화(붉은색)가 나타난다. 레이클, PNAS(200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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