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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1 20:24 수정 : 2006.03.01 23:05

조선 후기 지도인 동여도(위·서울대 규장각 소장)에는 안면도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소나무숲(아래)인 봉산이 모두 73곳에 설치돼 있음을 보여준다.

가지 하나 잘려도 조정에 보고
봄 파종뒤 경과 왕에 보고…어길땐 곤장 처벌
땔감 베려는 지역주민과 갈등…육지로 이주도

“윗가지 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 산지기 박문오, 뿌리 뽑힌 소나무 한 그루 산지기 박홍이….”

고종 21년(1884년) 정월 폭풍이 불자 충청수영은 이런 안면도 소나무 숲의 피해 실태를 담은 보고서를 조정에 보냈다. 구역마다 관리 책임자를 두고 나무 한 그루마다 피해 상태를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재수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28일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열린 ‘우리나라 전통 생태 세미나’에서, 안면도 소나무숲이 고려시대부터 약 1천년 동안 궁궐과 군선 목재 공급원으로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과학적이고 철저하게 관리된 실태를 소개했다.

소나무가 풍부하고 운송이 편한 안면도는 조선 초부터 전함과 수송용 조운선의 목재 공급지로 수군이 직접 관리했다. 나무를 베어내는 데 더해 적극적인 자원조성 정책도 폈다. 해마다 봄에는 어린 소나무를 심거나 씨앗을 뿌려 기른 뒤 연말에 살아남은 수를 왕에게 보고했다. 이를 어긴 현장 직원은 곤장 80대, 담당 관헌은 60대의 처벌을 받도록 <경국대전>에 기록돼 있다.

현재의 소나무숲.
이런 정책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곳곳에 주민의 출입을 금하는 봉표를 세운 봉산이 설치됐다. 산지기는 봉산에서 관할 구역을 둘러보고 나무가 없거나 훼손된 곳을 조사한 뒤 후계림을 조성했다. 관리지역, 조림면적, 조림방법 등도 상세히 조정에 보고했다. 산림 황폐 원인도 △헐벗은 자리 △벌채하고 남은 자리 △토끼가 어린나무를 훼손한 자리 △바람피해로 말라죽은 자리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자리 등 자세히 구분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고종 9년(1872년) 한 해 동안 충청수영이 소나무를 파종하거나 심은 면적은 2만㏊에 이른다고 배 박사는 추정했다. 그는 “이렇게 광범한 조림을 하려면 종자 채취, 묘목 생산, 조림 기술, 기술자 양성과 관리 등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안면도 소나무숲은 조선 후기 최대 건설공사였던 화성 건축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이때 기둥이나 대들보로 길이 2, 지름이 어른 어깨 폭의 2배인 80㎝짜리 안면도 소나무 344그루가 동원됐다.

배 박사는 조선 후기 지도에서도 안면도 소나무숲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확인됐다고 밝혔다. ‘동여도’는 안면도에 모두 73개의 봉산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5c그림 참조). 18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지도’에는 특이하게 서산군이 관리하던 안면도를 중요한 소나무숲의 위치에 따라 마치 각각 나누어진 섬처럼 표현하고 있다. 배 박사는 “지금의 영림계획구처럼 소나무숲을 경영구역 또는 생산구역으로 구분하여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국가의 집약적 관리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렇게 나라숲으로 철저히 관리하는 뒤안에는 소금을 굽기 위한 연료나 가정용 땔감으로 소나무를 베어 쓰려는 지역 주민과의 갈등이 잦아, 주민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거나 소나무를 배급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배 박사는 “조선시대의 산림은 안면도를 포함해 일부 금산·봉산을 빼고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황폐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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