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15 18:03 수정 : 2005.02.15 18:03

두차례 홍수로 밤섬·영등포와 ‘이별’

여의도 개발 이전 여의도 지역은 섬이라기보다 200만~250만평의 경계가 불분명한 모래밭에 가까웠다.

여의도가 모래밭이었다는 점은 여의도의 이름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은 “여의도(汝矣島)는 옛날에 한자로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洲)라고도 적었는데, 이를 고유어로 풀면 ‘너(나)벌(불)섬’ ‘너섬’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너벌섬은 ‘너른 모래벌판 섬’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예전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잉화도(여의도)가 서강 남쪽에 있고 목축장이 있다. 사축서·전생서의 관원 한 사람씩을 보내 목축을 감독한다”고 돼 있다. 조선 초부터 이곳이 말이나 양, 염소 등을 기르는 국립 목축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말산(養馬山·洋馬山)이라는 이름도 목축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의도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16년 일제가 이곳에 비행장을 설치하면서부터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귀국해 비행시험을 보인 곳이나, 1945년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이 귀국한 곳은 모두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해방 뒤에는 미군 비행장과 한국 공군 훈련장으로 사용됐다.

6·25전쟁 뒤 잠시 국제공항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58년부터 공군기지로만 사용되다 71년 2월 폐쇄됐다. 68년 여의도 개발계획에 따라 높이 16m, 둘레 7.6㎞의 둑이 쌓였고, 이후 국회와 증권거래소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가로 발전했다. 김규원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