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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6 18:11 수정 : 2005.02.16 18:11

현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한강 백사장의 1966년 여름 물놀이 모습. <동아일보> 제공



다닥다닥 긁어 아파트로…“한강은 호수”

한강 백사장은 한때 서울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정치집회장이었다. 이런 구실을 했던 그 넓던 한강의 모래톱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968년 한강 개발 이전 뚝섬과 동부이촌동, 압구정동, 광나루, 여의도 등 한강 곳곳에는 모래벌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냥 마시기도 했던 깨끗한 한강물에서 여름이면 수영을 하고 은빛 바람을 날리던 모래톱 위에서 모래찜질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국군의 날이면 한강 백사장에서 비행 시험이나 낙하 시범을 구경하기도 했다.

한강 백사장은 정치 집회장이기도 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던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1956년 5월3월 구름떼와 같은 30만명의 서울시민을 모아 유세를 벌인 곳이 바로 한강 백사장(현 용산구 동부이촌동 아파트촌)이었다. 당시 서울 전체 유권자는 70만명 가량이었다.

하지만 한강 모래톱은 한강 개발 과정에서 모래성처럼 사라졌다. 한강 개발 당시 하천을 준설하거나 둑을 쌓으면서 나오는 모래를 모두 퍼다가 팔았기 때문이다. 68년 시작된 제2차 한강 개발 당시 여의도·잠실·동부이촌동 등을 개발하면서 백사장을 없애 육지를 만들었다. 그 모래를 한강 개발의 밑천으로 삼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한강의 모래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시작한 제2차 한강 개발로 인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81년 9월 올림픽대회의 서울 유치가 결정됐다. 바로 다음달인 10월 전두환은 “한강의 골재와 고수부지 활용 방안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한강 전체에 물이 흐르도록 하고 둔치를 활용하기 위해 한강 모래밭을 파내도록 한 것이다.

82년부터 시작된 한강 종합개발사업은 총사업비 9560억원, 연인원 420만명, 장비 100만2천여대가 동원된 거대한 사업이었다. 4년 동안 한강에서 캐낸 모래와 자갈은 6369만㎥(액수 1962억원)에 이르렀고, 역시 이를 아파트 건설현장에 팔아 공사비를 충당했다. 86년 9월10일 한강 종합개발 종합준공식이 열렸고, 열흘 뒤인 20일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공사가 끝난 뒤, 한강은 둔치가 있는 호수로 바뀌었다. 김포 신곡수중보에 가로막힌 한강은 이제 모래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둔치에는 각종 체육·휴식 시설이 들어섰으나, 모래짐찔을 하던 백사장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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