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1 18:04
수정 : 2005.02.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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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18세기 중엽 풍류객들이 찾던 선유봉의 빼어난 경치를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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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서 ‘선유봉’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선유봉’은 한강의 절경 가운데 하나였다.
선유봉 강가의 버드나무 숲은 꽃이 필 때는 장관을 이뤘고, 금빛 모래밭의 풍치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1741년께 양천 현감을 지내며 선유봉을 가까이했던 겸재 정선은 선유봉 산수화의 대표 화가였다. 말을 탄 선비 일행이 줄지어 모래밭을 건너는 <선유봉>은 물론,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에 나타난 수려한 선유봉과 주변의 풍경을 보면 반세기 만의 ‘천지개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조선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은 <보만재집> 1권에서 서강·양화진 일대(서호)의 아름다움을 ‘서호십경’으로 읊었는데, 이 가운데 으뜸으로 ‘선봉범월’(仙峰汎月), 즉 ‘선유봉 아래 물에 비친 달’을 꼽았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리고 명산대천을 찾아 다녔던 양녕대군은 말년에는 이곳에 ‘영복정’을 짓고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고 전한다.
황해로부터 수백리 물길을 헤쳐 경강(한양 부근의 한강)에 들어오던 뱃사람들과 상인들도 한강에 비친 달과 선유봉을 보고 감탄했다. “에엥 차아/ 저 달 뜨자 배 띄우니/ … / 선유봉이 비치누나/ 선유봉을 지나치니/ 장유들 술집에 불만 켰네/ 마포에다 배를 대고/ 고사 술을 올려주면/ 한 잔 두 잔 먹어보세/ 헤엥 차아”(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서 채록된 뱃노래)
이렇듯 선유봉 풍경이 유명했던 이유는 경강에서 강화도를 거쳐 황해로 나아가는 뱃길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뒤 끊긴 이 뱃길을 지켜봤다는 김광수(79)씨는 “건너편 잠두봉(절두산) 아래 큰 양화나루에서 출발한 배가 선유봉 아래 ‘작은 양화나루’를 거쳐 바다로 나아가던 50년 전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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