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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324호 솔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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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놀라운 것은 한치 오차도 없이 은밀하게 다가서서 먹이감을 채는 놀라운 사냥솜씨였다. 녀석들은 노루새끼에서 부터 꿩과 쥐 등 닥치는 대로 잡았다. 그런 사냥감은 한번 날카로운 발톱에 움켜쥐어지면 절대로 빠뜨리는 법이 없었 다. 놈은 한번 짝이 맺어지면 평생을 함께 살고 있었다. 그걸 보면 사랑의 상징인 원앙새가 평생 둘이 바람피우지 않고 해로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바람둥이인 것을 생각하면 이 녀석들의 일구월심(日久月心)은 진정한 사랑의 화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 부엉이를 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데, 산에서 부엉이 새끼를 잡어와 기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랫마을 용호부락 사람인데, 그는 토끼장같이 지어놓은 망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그때보니 녀석은 구경꾼들에게 이골이 났는지 보아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사뭇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형형한 눈과 매서워 보이는 부리와는 달리 아직 몸뚱이는 가슴털이 솜처럼 부풀어 있어서 어린 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머리에 돋은 귓 털도 아직은 뚜렷하지 않았다. 부엉이와 올빼미의 구분은 귓털이 있는지 여부를 보면 안다. 둘 다 앞쪽에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큰 눈을 하고 있고, 고개도 좌우로 자유롭게 돌리고 발톱또한 갈퀴처럼 휘어져 있으나, 올빼미는 귀 털이 없는데 비해 부엉이에게는 그게 선명하다. 그런데 그때 본 녀석의 머리에는 아직 어린 탓인지 봉긋한 형태만 보였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거저 얻는 것을 ‘부엉이 집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가 TV를 통해 본 것은 그렇게 다람쥐처럼 어디다 보관해 놓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므로 그런 말이 생겨난 것은 어디까지나 녀석이 사냥을 잘하니까 한군데 몽땅 모아두지 않았을까 싶어서 지어낸 말이 아닌가 싶다. 부엉이가 새끼 키우는 법은 많은 걸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먹은 먹이를 토해 주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먹이를 물어다 주되 일부러 먹여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철저히 자립심을 심어주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리고 덩치가 점점 커감에 따라 너른 마당으로 유도하여 뛰놀게 하는데, 이것도 성장을 위한 치밀한 배려로 보였다. 사람들이 아직 어린 아이의 성장을 무시하고 어릴 때부터 학원으로 내모는 현실을 생각하면 체력부터 튼튼히 키워주려는 행동은 가상해 보이기 까지 했다. 뿐인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매정하게 내쳐버리고, 새끼도 또한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다 자란 사람들이 자립을 못라고 마마보이로 살아가는 것과 비교되어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얻은 것은 부엉이의 생태를 간접적이나마 대하면서 그 울음소리의 실체를 이해한 점이다. 예전에 시골에 살적에 보면 초저녁 산길을 가면 소쩍새가 ‘소쩍 소쩍’울어 왠지 처량한 생각이 들다가도, 부엉이가 ‘부엉 부엉’울면 소름이 좍 끼쳐지곤 했는데, 그것은 결코 공포심을 느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보니 그것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요, 짝을 찾은 간절한 사랑의 세레나데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귓가에 울리는 환청도 실은 무섭거나 거부감이 일지 않고 감미롭고 정다운 소리로 들려온다. 은근하면서도 다정하게 들여온다.(2008)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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