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15 19:20
수정 : 2012.10.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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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경북 구미시에서 발생한 불산 누출 사고 피해 주민들이 지난 8일 오전 구미시 산동면 구미코(구미전시컨벤션센터)에 마련된 임시진료소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이들 대부분은 마을 가까이 있는 사고 사업장에서 사고 위험이 높은 불산가스를 취급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유독가스에 노출되는 피해를 봤다. 구미/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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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화학물질 배출’ 환경부 조사
대상·범위 극히 적어 별도움 안돼
환경과학원 정보공개시스템도
유독물질 취급·저장량 공개 안해
“주민 감시 통해 안전 확보하게
화학물질 관리제도 재검토를”
구미 불산
화학공장과 같은 위험시설 인근 주민들에게 그 시설에서 사고가 날 경우 닥칠 수 있는 위험과 같은 정보에 대한 알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것은 세계가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합의한 원칙의 하나다. 인근 공장에서 어떤 유독물질을 얼마나 다루고 있는지 아는 것은 유독물질 누출 사고 때 주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인근 공장에서 다루는 유독물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주민들의 존재는 해당 공장에 안전 관리를 강화하는 압력으로 작용해, 잠재적 위험을 감소시키는 구실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96년부터 회원국들에 이런 원칙에 따라 화학물질 정보 공개제도 시행을 권고했다. 이런 권고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환경부가 화학물질 정보 공개제도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지만, 경북 구미 불산 누출 사고에서 드러났듯이 화학물질 취급 사업장 인근 주민들의 안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는 크게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신의 마을 근처에 위치한 한 공장에서 날아오는 불쾌한 화학약품 냄새에 불안해진 홍길동씨가 그 공장에서 어떤 유독물질들을 얼마나 취급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다. 환경부가 산업체들을 대상으로 화학물질 취급량과 배출량 등을 조사하고는 있지만, 조사 대상과 공개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근거로 한 환경부의 화학물질 배출량 조사는 수만종에 이르는 화학물질 가운데 415종을 대상으로, 그 물질을 연 10t 이상 취급하면서, 종업원 수가 30인 이상인 업체만을 상대로 이뤄지고 있다. 홍씨 마을 근처에 있는 공장이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홍씨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 기회가 없다. 구미에서 불산 누출 사고를 낸 업체도 종업원 수 기준에 미달해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홍씨가 관심을 갖게 된 업체가 환경부의 조사 대상에 포함돼 있다 해도 그가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홍씨가 일차적으로 궁금한 것은 해당 공장이 특정 유독물질을 얼마나 취급하고 공장 안에 얼마나 저장하고 있느냐이지만, 환경부 조사 내용을 공개하는 사이트인 국립환경과학원의 ‘화학물질 배출·이동량 정보시스템(PRTR)’은 이런 정보는 공개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해당 공장에서 특정 유독물질이 대기·수질 등으로 얼마나 배출되고, 폐기물 등에 포함돼 얼마나 이동되는지만 알려준다. 홍씨는 공개된 배출량 정보를 바탕으로 해당 공장이 특정 유독물질을 상당량 취급하며 저장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유독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보려면, 배출·이동량 정보시스템 사이트를 빠져나와 화학물질정보시스템(NCIS)과 같은 다른 사이트를 찾아가 검색해야만 한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은 사고 발생 우려가 높고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가 클 것으로 우려되는 불화수소 등 69종은 특별히 ‘사고대비물질’로 규정하고, 취급 업체들에 자체방제계획서를 작성해 지방자치단체와 환경부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홍씨가 자기 집 근처 공장이 사고대비물질 취급업체란 사실을 알았다면, 누출 사고가 날 경우 피해범위는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공장에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한 방제시설과 장비는 잘 갖춰져 있는지, 인근 주민에 대한 대피계획이나 보상계획 등은 잘 세워져 있는지 등을 방제계획서를 통해 살펴보고 싶을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홍씨가 이 회사의 방재계획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주민에 대한 자체방제계획서 사전 공개는 산업단지와 자유무역지역 안에 있는 사고대비물질 취급 시설에만 의무화돼 있기 때문이다. 설령 홍씨 마을 인근 공장이 산업단지 안에 들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사업체로부터 방제계획서를 제출받아 보관하는 지방자치단체가 ‘기업 비밀 보호’를 이유로 공개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구미 불산 누출사고 뒤 구미시와 대구지방환경청은 언론의 사고 업체 자체방제계획서 공개 요구조차 ‘기업 비밀 보호’를 내세우며 거부했다.
환경부의 현행 화학물질 배출·이동량 공개 제도 아래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홍씨와 마찬가지로 집 앞 유해화학물질 취급 사업장에서 누출사고에 잘 대비하고 있기만을 바라며 잠들거나, 1984년 12월 인도 보팔의 주민들처럼 집 옆 공장에서 어떤 유독물질을 다루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잠들어야 하는 형편이다.
구미 불산 사고 뒤 울산과 광양 등 산업단지를 끼고 있는 지역과 환경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점에 주목해 화학사고 예방과 대비를 위한 법률과 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환경단체들의 연대기구인 한국환경회의는 구미 불산 사고 관련한 성명에서 “주민 감시를 통한 노동 산업현장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주민 건강과 생태계를 보호하는 첫걸음”이라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달린 화학물질 관리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구미 불산 누출사고가 지역 주민의 유해물질 관련 정보에 대한 알권리를 명문화하는 관련 법 제정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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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선 ‘유해물질시설 정보’ 인터넷 등서 쉽게 보게 해
‘지역사회 알권리에 관한 법’ 기반 직원 10인 이상 소규모 사업체도 주·지역위원회에 비상계획 보고
미국은 1984년 12월 인도 보팔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유독물질 누출 사고를 계기로 가장 먼저 화학물질 정보 공개 시스템을 마련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미국의 화학물질 정보 공개는 1986년 제정된 ‘긴급계획 및 지역사회의 알권리에 관한 법’(EPCRA: Emergency Planning and Community Right-to-Know Act)과 1987년부터 도입한 유독물배출량조사제도(Toxics Release Inventory)를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
‘알권리법’은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모든 시설들에 연간 4.5t 이상 취급하는 유해물질들의 특성을 기록한 물질안전자료(MSDS)와 취급량을 주비상대응위원회(SERC)와 지역비상계획위원회(LEPC)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유해성이 매우 높은 350여개 물질은 연간 사용량이 0.2t만 넘어도 보고해야 하고, 니켈 카르보닐과 같은 극도로 유해하고 사고 위험이 높은 물질은 연간 취급량이 1파운드(450g)만 넘어도 보고 대상이다.
유독물배출량조사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운영하고 있는 ‘화학물질 배출·이동량 정보시스템(PRTR)’과 비슷하지만 적용 범위가 훨씬 넓다. 미국은 총 682종의 유독물질을 대상으로 연간 4.5t 이상 취급하는 종업원 10인 이상의 사업장에 적용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415종을 대상으로 연간 10t 이상 취급하는 종업원 30인 이상의 사업체를 대상으로 삼아, 안전관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규모 사업장 대부분이 제외되게 해놓은 것과 대비된다. 배출량 조사 정보는 인터넷 사이트에 해당 시설의 위치까지 표시한 지도와 함께 공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시설들에 이와 별도로 주비상대응위원회와 지역비상계획위원회에 시설 안에서 유해물질을 저장하고 있거나 처리하고 있는 곳의 위치와 담당자 연락처 등이 포함된 별도 보고서(Tier Ⅱ)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지역위원회에서는 주정부의 감독과 조정 아래 유해물질 취급 시설과 협력해 비상계획을 준비해놓고, 최소 1년에 한 번씩 점검을 하고 있다.
‘알권리법’에 근거해 주나 지역위원회에 보고된 정보는 대중이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접근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상계획도 원하는 주민들이 신청만 하면 언제든 받아 볼 수 있다.
김정수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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