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5 20:53
수정 : 2013.01.25 20:55
[토요판] 김보경의 달콤한 통역 왈왈
마감이라 교정지에 코를 박은 채 일하고 있는데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터지듯 밀려오는 울음소리.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긴 울음이 끝나자 18살 노견을 떠나보냈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울어주는 것뿐이었다. 호흡곤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안락사로 보냈다고 했다. 잘한 결정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죄책감을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 됐다. 노견 뒷바라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온라인 반려동물 카페 회원들이 힘든 치료와 안락사 결정, 장례 과정까지 내내 곁에 있어 주었다고 했다.
1년 전 19년을 함께한 반려견이 떠났을 때 우리는 가족의 예를 다했다. 부모님과 월차 휴가를 낸 형제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화장터로 향했다. 선배는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 지금 가족처럼 좋은 가족 만나길’이라는 글귀가 쓰인 조의금 봉투를 건넸다. 고맙게 받았다. 녀석이 노환으로 아플 때 술 한잔 하자는 친구에게는 “가족이 아픈데 술을 먹자고 하냐. 이 정신 나간 놈아!” 쏘아붙였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진화해가는 것이다.
어릴 적 엄마가 “때로는 친척이 친한 이웃만도 못할 때가 있다”고 했던 말을, 그때는 이해 못했는데 나이 들어 보니 알겠다. 핏줄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개념이 과연 지금 우리가 맺고 사는 다양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올해 명절에도 어김없이 “결혼은 정말 안 하냐”는 친척의 고민 없는 질문에 부글부글 끓었는데, 그보다는 전 부치고 있을 때 옆에서 참견했던 우리 집 개와 고양이가 내게는 가족의 개념과 더 부합했다.
지난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이 들고서는 잘 찾아뵙지 못했던 터라 영정을 뵈니 죄송했지만, 크게 아프지 않으셨고 백수를 앞두고 돌아가셨으니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촌들이 모두 모여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반려동물과 사는 이들끼리 모였다. 최근 모두들 20년 가까이 함께 산 반려견을 잃은 터라 아픈 마음을 나누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다가 새로 입양한 반려견 얘기에는 사진을 돌려 보며 떠들썩해졌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온 손주들이 동물 얘기나 하며 시시덕거린다고 불편한 눈길을 보내는 어르신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린 반려동물이 가족인 세대인 것을.
“암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유일하게 웃게 했던 자식은 우리 집 개였어요”라고 이웃이 말했다. 반려동물 덕분에 서먹한 아버지와 한결 친해졌다는 집도 많다. 반려동물이 효도도 하고, 기존의 가족관계를 더 돈독하게도 하니 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는 것이 못마땅한 분들도 마음을 열어주기를.
내 가족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돈만 보내주는 기러기 엄마인데도 잘 커주는 방글라데시의 딸은 어린이에서 숙녀가 됐고, 보호소의 유기견 ‘나미’는 노년에도 잘 지낸다. 며칠 전에는 길고양이 밥을 주는 곳에 가보니 다른 캣맘이 놓고 간 사료가 가득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그분과 나는 같은 길고양이를 돌보는 두 엄마인가? 물론, 기왕이면 잘생긴 아빠였으면 하고 바란다.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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