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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타기 명수’란 별명이 있는 작지만 바지런한 텃새 동고비가 딱따구리 둥지를 좁힐 흙덩이를 물고 와 다지는 작업을 하기에 앞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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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바람 숲] ‘나무타기 달인’ 동고비의 겨울나기
어김없이 숲에도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숲을 채운 나무들은 빈 몸으로 얼어붙은 듯 서 있고, 새들은 움직임을 자제한 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겨울 숲에서도 유난히 분주한 새가 있습니다. 동고비라는 친구입니다. 동고비는 참새 크기의 우리나라 텃새입니다. 새 중에는 나무타기의 선수들이 몇 있습니다. 나무를 제대로 타려면 나무줄기에 매미가 달라붙듯 앉을 수 있어야 하는데 딱따구리, 나무발발이, 그리고 동고비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딱따구리와 나무발발이의 경우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갈 때는 나무타기의 선수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어설픈 뒷걸음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동고비는 위는 물론이고 아래로 내려갈 때도 머리를 앞세우고 움직이니 단연 나무타기 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동고비에겐 또 하나의 남다른 재주가 있습니다. 딱따구리의 둥지 입구에 진흙을 발라 제 몸에 맞게 재건축하는 아주 특별한 재주입니다.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아래쪽으로 파 내려가 나무 속에 빈 공간을 만드는 식으로 둥지를 짓습니다. 추울 때는 따뜻하고 더울 때는 선선하며,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몰아쳐도 걱정이 없는 둥지입니다. 지푸라기를 엮어 사발 모양으로 만든 둥지와 달리 천적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니 좁은 입구로 고개만 내밀고 방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둥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무를 파서 둥지를 지을 수 없는 숲의 다른 동물들이 이 꿈의 둥지를 어떻게든 빼앗으려 덤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번식기인 봄철에 이르면 딱따구리 둥지를 둘러싼 다툼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 대목에서 작고 힘없는 동고비는 묘책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번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겨울 끝자락에 알맞은 딱따구리의 둥지를 찾은 다음 곧바로 입구를 좁히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큰 친구들은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말입니다. 물론 재건축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집 보러 다니기’입니다. 이곳저곳 꼼꼼히 둘러보며 마땅한 둥지를 찾는 일은 대개 12월 초부터 시작합니다. 딱따구리의 둥지를 동고비가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딱따구리는 여러 곳에 둥지를 만들며, 그중에는 사용하지 않는 둥지가 있기 때문에 발품만 열심히 팔면 좋은 둥지를 구할 수 있습니다. 둥지가 정해지면 입주를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청소입니다. 옛 주인인 딱따구리는 작은 나무 부스러기를 톱밥처럼 바닥에 깔아 두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선 둥지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모두 밖으로 버립니다. 둥지 청소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며 이어서 본격적으로 진흙을 나르기 시작합니다. 진흙은 콩알보다 조금 큰 크기로 둥글게 뭉쳐 오는데, 하루에 평균 80번 정도를 물어 나릅니다. 동고비가 진흙에 보이는 애정은 각별합니다. 가끔 진흙을 붙이다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떨어지는 진흙을 따라 날아가 공중에서 부리로 잡을 때가 많고, 진흙을 놓치더라도 결국은 찾아옵니다. 번식의 시작은 둥지이며, 번식은 간절함으로 시작해 간절함으로 끝납니다. 재건축의 내용은 입구를 좁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입구를 좁히는 사이에 나뭇조각을 나르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딱따구리가 번식을 치러낸 둥지는 동고비에게 필요 이상으로 깊습니다. 나뭇조각의 용도는 바닥에 쌓아 깊이를 조절하기 위함입니다. 둥지의 바닥 높이가 조절되면 바로 나무껍질을 나르기 시작합니다. 나무껍질은 알을 품기 위한 침구입니다. 딱따구리는 바닥 침구로 톱밥을 깔고 동고비는 대팻밥을 깐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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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많은 동물에게 ‘꿈의 보금자리’인 딱따구리 둥지를 차지하기 위해 흙더미로 둥지의 들머리를 좁히는 공사를 하고 있는 동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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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제 몸을 밀어넣기도 힘들만큼 구멍을 좁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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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돌아온 청딱따구리가 온종일 동고비가 해놓은 재건축 공사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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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안식처다
주인 없는 새 자리잡은 동고비는
덩치 큰 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진흙을 물어와 입구를 좁힌다 저녁때 들어온 딱따구리가
집을 부수면 다음날 다시 짓고
이렇게 100여일 거듭하기도 한다
불굴의 ‘동고비 정신’이다 나무껍질을 까는 일정까지 끝나면 입구를 완전히 좁힙니다. 때로는 너무 좁혀서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조금씩 넓혀갑니다. 그러다 몸을 비비며 간신히 들어갈 정도가 되면 재건축의 대장정은 끝납니다. 재건축 기간은 약 3주며, 이후 일주일 정도에 걸쳐 튼튼히 굳히는 기간을 거치면 둥지는 완성됩니다. 둥지가 완성된 뒤로 알을 낳아 품고, 부화한 어린 새에게 먹이를 날라 키워 둥지를 떠나기까지는 약 50일이 걸립니다. 둥지는 오로지 암컷만 짓습니다. 수컷은 둥지를 지을 때 등 뒤를 보기 어려운 암컷을 위해 경계를 서줍니다. 뾰족했던 암컷의 부리는 둥지가 완성될 즈음 닳아 뭉뚝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흙 하나를 뭉쳐와 벽에 발라 곱게 펴기까지는 255번이나 부리로 다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동고비는 작고 약한 새입니다. 하지만 작고 약함을 부지런함으로 극복합니다. 그런데 동고비의 집 장만이 이 수준의 애씀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필이면 딱따구리가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둥지에 진흙을 발라 좁히려는 동고비가 있습니다. 딱따구리는 이른 아침 둥지를 나서 먹이 활동을 하다가 어두워지면 다시 둥지로 돌아와 잠을 자는 습성이 있습니다. 번식 일정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면 날이 밝은 시간부터 어둠이 내리기까지 둥지는 비는 셈입니다. 둥지가 빈 사이 동고비는 열심히 진흙을 발라 좁히고, 밤이 되면 딱따구리는 삽시간에 진흙을 허물고 들어가 잠을 자며, 다음날 아침 동고비는 처음부터 다시 진흙을 붙이는 일정이 이어집니다. 하루 10시간 진흙을 물어와 다진 고된 작업이 딱따구리가 돌아오면 1분도 안 돼 물거품이 되지만, 이튿날 아침 동고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을 106일이나 반복하다 결국 포기한 동고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차지하려는 둥지의 딱따구리가 제 짝을 데려와 번식에 들어가자 둥지가 한순간도 비지 않기 때문에 포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고비는 왜 이리도 무모한 행동을 지속할까요? 가능성 때문입니다. 딱따구리가 번식에 들어서면 수컷이 잠을 자는 둥지를 떠나 새로운 둥지로 옮길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만약 수컷이 자신의 둥지로 암컷을 불러들여 번식을 한다면 동고비는 절대 그 둥지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수컷과 암컷이 서로 교대를 하며 둥지를 지켜 24시간 둥지는 비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고비는 딱따구리 수컷이 자신의 둥지를 떠나 새로운 둥지로 옮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동고비가 딱따구리 암컷이 사용하는 둥지에 도전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딱따구리 암컷은 번식에 들어서더라도 번식 둥지의 밤은 수컷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딱따구리 암컷의 둥지는 1년 내내 비지 않기 때문에, 불굴의 동고비조차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일에 도전하지는 않습니다. 내년 봄은 아직 아득한데 동고비는 벌써 딱따구리 둥지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더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고 숲에 번식의 계절이 돌아오면 동고비는 또다시 어느 둥지에 진흙을 붙이기 시작할 것이며, 날마다 짓고 무너지는 일상은 여전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앞날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더불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전하는 정신 곧 ‘동고비 정신’이 어쩌면 동고비 종 보전의 원동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 김성호 서남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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