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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아빠의 실수 이후 고양이 사료는 각각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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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생명
아저씨의 길고양이 입양기
▶ 나는 지난 20년 동안 환경운동을 해 왔다. 환경 현장을 중심으로 환경정책의 변화를 추구했다. 특히 도시하천 정책, 댐 반대 운동, 4대강 사업 등 물·하천 분야에 집중해 왔다.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길고양이를 입양하게 되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길고양이를 통해 가족의 의미와 이전까지 머리와 가슴으로만 인식했던 생명의 가치에 대해 좀 더 실천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야 이놈들아! 안 내려와? 이런 썩을 놈들.”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욕쟁이 할머니가 강림하셨다. 서서히 청소년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고양이 두 마리가 싱크대에 뛰어올라 음식물 찌꺼기에 킁킁댔나 보다. 몇번 있던 일인데도 이날따라 어머니 반응이 좀 유별나다.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들이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아예 찢어놔, 음식물 찌꺼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네 새끼들 좀 어떻게 해봐. 또 말썽부렸잖아!”
잠결에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소리 하신다. 이럴 때는 무조건 웃어넘겨야 한다.
“아니 엄마는 혼내려면 엄마 새끼를 혼내지 왜 내 새끼들 갖고 그래요.”
어머니에게 농담을 던지고 바로 ‘전용 안마사’와 ‘프리허그’ 모드로 돌입한다. 그게 지난 몇달 동안 고양이들과 동거하면서 터득한 어머니 화 푸는 방법이다. 물론 가끔 “그래서 지금 내 새끼 혼내고 있잖아”라는 역효과도 있지만 말이다.
어머니의 고양이들에 대한 불만은 여럿이지만 그래도 고양이들에게 “뽀뽀”하면서 제일 많이 챙겨주시는 것도 어머니다. 그게 다 개명한 덕분이다.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 처음 붙여준 이름은 ‘아롱이’와 ‘다롱이’였다. 그런데 올해 일흔넷 되신 어머니가 계속 ‘아롱다롱’을 헷갈려하신다. 그때 본능적으로 눈치를 챘다. 고양이들이 어머니랑 친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상당히 괴로운 일이 많겠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놈들의 특징을 잡아 이름을 다시 지었다. 짙고 옅은 노란색이 있는 고양이는 ‘노랭이’로, 그리고 밥 달라고 시시때때로 징징거리는 놈은 그 특징을 살려 ‘징징이’로 말이다. 어머니가 고양이들을 명확히 구분하시는 걸 보면 효과는 확실했다. 역시 사람이나 고양이나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그래서 내 이름도 고쳐볼까 고민 중이다. 평생 ‘쇠’로 살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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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를 입양한 뒤 이철재(44)씨와 어머니 송기순(73)씨는 동물과 가족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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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는 안 보이고 야위어만 갔다
손 깨물고 할퀴는 신경전 끝
노랭이가 처음 발밑을 알짱거렸다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준 것 사료 주면서 갑자기 뭉클…
아빠 마음이 이런 것인가 보다
두 마리는 아옹다옹 먹더니 구토
밥그릇을 따로 줘야 했던 것
난 아직 초보 고양이 아빠다 그렇게 새끼를 돌보던 어미가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사라졌다. 하루이틀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사이 채 눈도 못 뜬 새끼들은 어미를 찾으며 연신 가냘픈 목소리로 울어댔다. 젖 대신 우유라도 먹여야 될 듯싶었다. 고무장갑 끝을 바늘로 뚫어 어미 젖꼭지 흉내도 내봤다. 여의치 않아 한 마리씩 안고 숟가락으로 우유를 떠먹여도 봤다. 며칠 지난 뒤 학교 갔다 오니, 고양이 집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세심한 어머니는 막내아들 오기 전에 서둘러 죽은 고양이들을 내다 버리셨던 것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아마도 내가 길고양이 새끼들을 돌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그때의 기억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고양이 두 마리를 내 방에 뒀다. 야위었다고 해도 길고양이 습성이 배어 있기에 조그만 틈만 있으면 숨으려 했다. 고양이들은 사람이 없으면 서럽게 울어대고, 먹이 주려고 하면 손을 깨물고 할퀴는데, 피가 제법 나는 것이 새끼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 목욕시킬 때는 아예 두꺼운 장갑을 껴야만 했다. 며칠 동안 고양이들과의 신경전이 계속됐고, 되도록 정해진 시간에 밥과 물을 주려고 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란 존재를 그들에게 알려 나갔고,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함께 살 식구란 것을 얘기했다. 아니 마음으로 전하려 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다행히 노랭이가 먼저 마음을 열어줬다. 징징이보다 더 유약했던 노랭이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발밑을 알짱거리며 상호 존재에 대한 교감을 보내준다. 며칠 뒤 늘 ‘씨약’ 소리를 내며 경계하던 징징이도 노랭이를 따라 내게 다가왔다. 어느새 내 허벅지가 이들의 침대가 됐고, 내 뽈록한 배는 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이 때문에 나는 올해 다이어트할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남들은 좋은 핑계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불에 누워 있으면, 두 마리 다 내 팔에 머리를 올리고 누워서 기분 좋다며 ‘갸르릉’거린다. 한술 더 떠 이놈들은 어머니가 누워 계셔도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머니 팔을 베고 눕는다. 그러니 고양이 털 날린다고 투덜대시는 어머니도 이놈들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싶다. 이런 행동은 고양이들도 나와 어머니를 자기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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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해진 고양이들은 어느새 아빠의 허벅지를 침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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